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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김수호-창작학습시 153

자랑스러웠으면 좋겠다 - 김수호 (1940~ )

자랑스러웠으면 좋겠다 - 김수호 (1940~ ) 권력과 명예를 위해 한판을 겨룬다, 바로 코앞이다 아무도 제 할일만 내걸고 돈은 말하지 않지만 명예는 권력과 돈이 야합한 서자일 뿐 대개 부끄러운 알몸을 뻔뻔하게 시장 바닥에 내던진다 반세기만에 고향에서 맞는 첫 지방선거 육지보다 셋을 덜 뽑는데도 다섯을 찍어야 한다니 주머니 수북한 명함이며 휴대폰엔 줄불난 문자 길목마다 후보 따라 유니폼에 로고송이 신나게 흔들거린다 무슨 살 판인지 옛날 지워진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제발, 사람은 잘 뽑았으면 좋겠다 양다리 걸치다 제 갈 길 잃고 어정거리더니 토종이 대가 세다고 외래종 돈 냄새를 향기라며 시침 떼더라 유효기간도 몰라 폐종만 추려 외톨이가 되면서 그 귀한 여의도 머릿돌감 뭉개버린 건 코미디가 아까웠다 ..

시간관념 - 김수호 (1940~ )

시간관념 - 김수호 (1940~) 내 안채 관리하는 못 말리는 집사 문화인 자격인증서 목에 걸고 약속 시간에 앞서 어김없이 노크하네 기다리게 함은 남의 돈 빼앗는 죄악 시선 끌려고 일부러 늦는 짓은 최악 그 허접한 수첩을 들척거리며 가끔 부부가 느긋이 쇼핑나갈 때에도 빚쟁이 뺨치는 찰거머리 닦달로 현관 나서기도 전에 진을 다 빼놓네 5분 전에 도착할 출발 시간 셈하며 늦을까 봐 늘 신경쓰는 이 강박 해고 통보나 받아야 누그러들는지 (101217)

제주 까마귀의 트라우마 - 김수호 (1940~ )

제주 까마귀의 트라우마 - 김수호 (1940~ ) 한라산 중턱 해발 600의 민오름 숲 속엔 시끌벅적 까마귀 떼 공수해 온 까치한테 안방 빼앗긴 뒤로 닥아오는 건 모두 적이라는 듯 산메아리로 서로를 깨우며 경계한다 그 시악 쓰는 소리 살벌한 숲길 지나며 하늘의 뜻을 기다려 보라, 어쩌면 너희 때가 다시 올지도 몰라 제 발 저리는 도둑처럼 공연한 생색을 돌아가는 메아리 편에 실어 보낸다 (120708)

성탄 전야에 내린 눈 - 김수호 (1940~ )

성탄 전야에 내린 눈 - 김수호 (1940~ ) 시드니 외곽 본다이비치의 성탄절은 섭씨 30도의 해변 축제 비키니에 고깔모자의 아가씨들을 보고 그 꽃송이에 낚인 건달들인가 휩쓸려 온 흰나비 떼 좀 보소! 지구 윗쪽의 섬 제주도의 아파트 골짝에서 오르락내리락 구석구석 살피며 본새 좋게 춤을 추며 후려내다, 멈칫 발길 닿은 자리에서 숨 돌리며 길 잘못 든 걸, 아니면 꿈 잘못 꾼 걸 뒤늦게야 깨달았나 보다 어느 해 여름 이 산책길에서 매미의 떼주검 그 짓밟힌 험한 꼴은 전해 들었는지 성탄일 아침해가 뜨기 바쁘게 슬그머니 한라산으로 자리를 뜨는구나. (101226) * 본다이비치(Bondi Beach)/ 호주 시드니 외곽에 위치한 해변, 많은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광객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는 곳..

꽃과 미녀 - 김수호 (1940~ )

꽃과 미녀 - 김수호 (1940~ ) 쌍둥이 같아 보여도 장미꽃을 접붙인 동백꽃에는 장미 향기가 나지 않네 제 낯을 앨범에 묻고 탤런트 닮게 리모델링한 짝퉁 미녀에게 개성미가 감춰지듯, 판박이라 눈으로 못 가려내도 제 체취가 있기에 그나마 연인에겐 다행이네 칠흑 같은 어둠 속인들 웬 더듬질 말없이 스치는 숨결 하나면 콕 집어낼 테니 (140509)

늙는다는 것 - 김수호 (1940~ )

늙는다는 것 - 김수호 (1940~ ) 떠들석한 봄이지만 아이 울음소리 그친 마을이 누렇게 사위어 가듯 수다스런 내 주변도 뒤늦게 허기로 채워지는 일찍 까먹은 도시락 입다물고 귀도 막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면 환승객도 없는 시골역 야간열차의 종점이 으스스하게 두 팔을 벌린다 철길이 끊긴 터널처럼 (1406113)

걱정하지들 마세요 / 병만이의 연기 철학*

걱정하지들 마세요 / 병만이의 연기 철학* 실수해서 다쳐도 제가 다치는 거니까요 걱정하지들 마세요 대사를 못 외우고 버벅거려도 가슴이 헉헉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려 노래를 제대로 못 불러도 제가 창피 보는 거니까요 걱정하지들 마세요 전 어떤 위험이나 창피도 다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정말 걱정하지들 마세요 * 한겨레와 '달인' 김병만과의 대담 중에서 발췌 (김수호)

소나무 그늘에서 - 김수호 (1940~ )

소나무 그늘에서 - 김수호 (1940~ ) 철철이 자라는 애들이 어른스레 낯빛을 바꿀 때면 우락부락한 아비도 제 살붙이를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지만 떼어 내는 아픔을 몸부림치며 내보이지도 소리치지도 않고 끝내 아무런 티를 내지도 않는 것은 그 고매한 체면 탓인가 잡지도 쏟지도 못해 머금은 아쉬운 속정인 듯 깡마르며 한껏 쪼그라든 솔잎을 덮어주는 소나무 품이 솜이불 만큼이나 두툼하구나 (140527)

절제節制 - 김수호 (1940~ )

절제節制 - 김수호 (1940~ ) 한때는 설탕에 프림도 팍팍 아무때나 마셔 댄 걸쭉한 커피 이후엔 프림도 빼고 이젠 커피 둘에 노 슈가 또 세 끼에서 더 줄여 점심 후 한 컵 내 입안이 짜낸 진한 아쉬움 실내악과 벗하는 저녁이면 코끝을 당기는 그 향기의 유혹 빼고 줄이고 끊는다는 건 밑바닥 앙금을 휘젓는 소용돌이가 제풀에 갈아앉을 때까지 마음이 걸러 낸 말간 기다림 (10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