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2-4 김수호-문화새나시 130

[유희경의 시:선] 꽃비 같은 하루 [문화/ 2024-04-17]

택배, 사람 - 박연준 도착과 동시에 떠나야 하는 한 송이 누군가 그를 세고 또 센다 건네기 위해 하루를 다 쓴 한 송이 받으세요 받으시고 영원히, 받으소서 우리와 우리 아닌 것 사이에 낀 한 송이 지나쳤지? 지나쳤지 셀 수 없는, 여름이 오면 좋겠다 - 박연준 시집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꽃비 같은 하루 갈래? 가자. 간단하게 주고받은 다음 새벽부터 아버지를 뵈러 간다.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스무 해. 산소에 가도 아버지는 없는데, 알고도 간다. 동생과 매부와 그들의 아이들과 나와 아내와 어머니가 한 차에 실려 아버지께 간다. 봄이 왔으니까.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길은 참 지루하다. 그러니 온갖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간 있었던 일, 날씨와 경제 걱정. 이야깃거리는 한도 없다...

[유희경의 시:선] 꿈을 가진 마음 [문화/ 2024-04-03]

꿈틀거리다 - 김승희 어느 아픈 날 밤중에 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할 때도 괜찮아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 꿈꾸는 것은 아픈 것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틀꿈틀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김승희 시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꿈을 가진 마음 서점의 일상을 요약하자면 ‘고요한 가운데 번잡함’일 것이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하루를 보내고 밤이 오면 풀려버린 운동화 끈처럼 맥을 놓아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즈음 서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애틋한 동질감을 느낀다. 김종삼의 시 ‘묵화’ 속 할머니와 소처럼 서로의 부은 발잔등을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날 밤 찾아온 학생은 문 닫을 시간을 넘겨서까지 책장 앞을 서성였다. 잠시 후 계산대 앞에 다가선 그는 시집..

[유희경의 시:선] 연하장 쓰는 일 [문화/ 2023-12-27]

‘당신의 편지가 오네 오고 있네 내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당신의 혀가 내 귓불에 닿고 당신의 부드러운 혀가 내 귀 안에 이미 있네 당신 편지는 오고 있네 오네 동구 밖까지 왔을까 잡화점 앞을 무사히 지났을까’ - 장이지 ‘기대’(시집 ‘편지의 시대’) 연하장 쓰는 일 대형 서점에 들렀다가, 즐비한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에 새삼 놀라며 깨닫는 세밑은 즐겁다. 아직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있다. 그사이 차곡차곡 손 글씨로 눌러 담는 안부와 바람의 인사들이 가득할 수 있다니. 어쩐지 안심이다. 덕분에 몇 장 카드를 마련했다. 나도 카드를 써야지. 근사한 선물은 힘들지만 카드 정도의 사치쯤은 호기롭게 누려 보기로 한다.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리며 고르다 보니 손에 쥐게 된 카드의 수가 너무 많다. 어떤 식으..

[유희경의 시:선] 마주하기 [문화/ 2023-12-13]

공고 - 민구 마주를 구합니다 그는 길들일 수 없고 작은 일에 짜증을 내며 당신이 상상하는 높이의 울타리를 가볍게 넘어갑니다. (민구 시집 ‘세모 네모 청설모’) 마주하기 스마트폰을 멀리 두고 지낸 지 몇 주가 흘렀다. 요즘 우리는 전화기로 전화 통화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전화 통화를 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벽을 바라보고 혼잣말을 하는 사람처럼 화면을 마주 대한 채. 스마트폰을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대개 이렇다.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걷는 사람들. 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연인들. 일제히 전화기 쪽으로 고개를 숙인 대중교통 안 사람들. 새삼스러울 것 없는, 문득문득 무섭고, 괴상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섬처럼 ..

[유희경의 시:선] 나와 나, 우리 [문화/ 2023-12-06]

거울과 거울 - 양안다 왼쪽 거울에 내가 보인다. 오른쪽 거울에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보인다. (양안다 시집 ‘몽상과 거울’) 나와 나, 우리 요 며칠 시무룩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기 때문이다. 나이 좀 먹었다고, 어릴 때와는 다르다고 방심했던 탓이다. 상자 안에는 나에 대한 온갖 평가와 정의가 담겨 있었다. 나와는 무관한 성질의 것이라 확신하던 정의들이 마음 이곳저곳에 엉겨 붙었다. “몰랐어? 너는 그런 사람이야.” 정말 몰랐다. 내가 그렇단 말인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의 섞인 변명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너는 너를 잘 모르는구나”라는 말도 듣고 말았다. 부정하면서도 그럴수록 나에 대..

[유희경의 시:선] 마음대로 [문화/ 2023-11-29]

마음 06:53 AM - 성기완 마음은 아주 멀리도 갑니다 안개와 함께 안개처럼 다닙니다 가는 비의 맘을 품고 마음이 그리는 그림은 때로는 방울 때로는 연기 때로는 경이로운 별자리 납작해진 초콜릿 무엇을 그리든 마음의 붓질은 운명이 됩니다 (성기완 시집 ‘빛과 이름’) 마음대로 한 소설을 읽다가 ‘마음’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마음을 ‘열리고 닫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대체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것은 어떻게 열리는 것일까. 문이 달려 있나. 미닫이일까 여닫이일까. 냉장고 속 잼 통처럼 생긴 것은 아닐까. 힘주어 돌리면 공기가 빠지며 개봉되는 형식. 마침내 겨울이다. 겨울에는 이러한 몽상이 잘 어울린다. 날씨와 관계없이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길을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늦은 ..

[유희경의 시:선] 샤워를 하다가 [문화/ 2023-11-22]

눈사람 신비 - 황유원 한밤중에 뜨거운 물을 끼얹으면 좋은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사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기분인데 기분이 꼭 생각인 것만 같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분이 꼭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황유원 시집 ‘하얀 사슴 연못’) 샤워를 하다가 겨울밤 뜨끈한 물로 하는 샤워. 비견할 즐거움이 또 있을까. 종종 샤워를 하는 도중, 머리를 감거나, 온몸에 비누칠을 하다 말고 문득, 겨울밤 샤워가 금지될 만한 극단적 상황을 상상하고 몸서리치곤 한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이 세계의 평화는 겨울밤 따끈한 샤워를 위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 입을 앙다물기도 하는 것이다. 샤워기가 쏟아내는 온수 아래서 나는 온갖 상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에게로 돌아오기[유희경의 시:선] 일에게로 돌아오기 [문화/ 2023-11-15]

일 앞에서 - 박세미 일 앞에서 나는 스스로를 인질 삼아 겁박한다. 나는 인질로서 겁에 질린 동물처럼 꼬리를 감치고 눈을 감고 어떤 발언도 삼간다. 이 인질극은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몇 번의 소나기에 흠뻑 젖었고, 몇 번의 폭설에 네 발이 얼었다 녹았으며 (박세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 일에게로 돌아오기 곧 착륙할 것이다. “오~” 하고 발음할 때의 입 모양을 닮은 창문 너머를 본다. 베를린으로부터 돌아오는 중이다. 구름 위의 하늘은 언제나 파랑. 비도 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야말로 순정한 파랑. 6박 7일 일정의 출장이었다. 지난여름에 잡힌 일정이었으나, 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출국 날짜가 다가올 즈음, 내심 이 출장이 취소되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출장을 제안한 출판사 대표는 내게 “휴가라..

[유희경의 시:선] 아까운 가을 [문화/ 2023-11-08]

처서 - 임유영 아무도 아무에게도 왜 사냐고 묻지 않았어요 넌 얼마나 가졌니, 나무에게 물으니 가난한 나뭇잎이 쏴아아 요란하게 떠들어댑니다 웃음을 꾹 참으면 안 깨끗한 물이 눈에서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파도의 성분입니다 (임유영 시집 ‘오믈렛’) 아까운 가을 낙엽이 절정이다. 하나둘 떨어져 어느새 한가득한 낙엽을 두고 보다가, 마냥 그럴 수는 없어 빗자루를 들고 나선다. 한참 쓸고 있는데, 지나던 노인 한 분이 “아까우니 그냥 두어요” 하고 말을 건다. 농이겠거니 웃어넘겼는데, 노인이 떠나고 비질을 마친 뒤에도 나는 그 말을 반복해 떠올려보다가 마침내 궁금해지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저 낙엽이 다 돈이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럼 나는 부자일 텐데. 그러나 낙엽은 돈이 아니고, 그러니 많아도 소용이 ..

[유희경의 시:선] 현실, 비현실 [문화/ 2023-11-01]

무대륙 - 고선경 명백히 현실에도 대륙이 있고 나라가 있고 지역이 있다 심지어 집도 있다 집집마다 사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당신은 아는가! (떠난 모험가를 향하여) 게임을 종료하면 대륙을 떠나면 나는 나를 사냥해야 해 (고선경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현실, 비현실 서점에서 강의를 맡은 시인이 나타나지도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화가 났다가 나중에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초조해져 기다리는데, 그가 얼굴을 내민다. “어떻게 된 거야?” 화를 내는 나를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살피다 이내, 알았다는 듯 웃는다. 그가 내민 것은 플라스틱 장치였다. “이게 뭐야?” 묻자, 배시시 웃으며 “감옥” 하고 대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스마트폰 감옥’이다. 전화기를 넣고 덮어두면, 설정해놓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