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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 130

[유희경의 시:선] 차분한 삶에 대하여 [문화/ 2023-06-07]

꽃이 나를 보고 있다 - 김용택 꽃에 물을 주며 생각한다 지금 꽃에 물을 주는 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자 다음에 할 일을 지금 생각하다 보면 꽃에 물 주는 일을 서두르게 되고 꽃에 물 주는 일이 허술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꽃에 물을 주며 딴생각하는 내가 나를 타이르는 것이다 꽃이 나를 보고 있으니까 (김용택 시집 ‘모두가 첫날처럼’) 차분한 삶에 대하여 ‘사람들 성격 참 급해.’ 버스에 타고 있으면 이런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정류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르르 일어나는 사람들. 교통카드가 태그하는 소리.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계단에 내려서기 바쁜 발들. 완전히 정차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는 안내 문구가 무색해지는 장면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걱정에 앞서 웃음부터 난다. 분명, 나도 저럴 ..

[유희경의 시:선]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문화/ 2023-05-31]

노크 - 김상혁 사람 정말 싫다. 내가 이런 말 하면 나의 다정한 사람은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름들 몇 개 들려주거나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손잡아준다. 시험에 든다는 말, 교회에서 자주 듣는 말. 가령 싫고 징그러운 것들 커다란 광주리 안에 하염없이 쏟아놓고 그 속 어딘가에 내가 미치는 물건 몇 개 숨겨두는 신의 기호(嗜好) 같은 것. (김상혁 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서점의 일’에 낭만을 느끼는 이들은 “서점을 하신다니 좋겠어요” 하고 말을 건넨다. “어떤 점이 좋을 것 같아요?” 되물으면, “조용한 곳에서 종일 책 읽는 일이니까요”와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반면, “책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어렵겠어요.” 걱정해주는 현실적인 사람들도 있다. 역..

[유희경의 시:선] 피난처 [문화/ 2023-05-24]

강릉 점집 - 정끝별 쉬운 일이 없어 나는 숨어듭니다 그러다 문득 왜 이리 쉬운 일이 없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못내 지나 끝내 넘어 달마처럼 동쪽으로 가고 또 가 한 줄 수평선에 엉망의 끝을 부려놓고 싶어집니다 (정끝별 시집 ‘모래는 뭐래’) 피난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되는, 공통의 장소가 있다. 유년의 옷장. 오직 아이만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비좁고 포근한 곳. 무서우니까 문은 조금 열어두고 숨어 있을 수 있는 곳. 조마조마하면서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 속에서 아른대는 먼지의 수를 세다가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마는 경험이 내게도 있었다. 그 아득한 경험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늦잠 탓에 늦었고 덕분에 한적한 버스 안에서 나는 익숙한 졸음을, 어린 시절 옷장..

[유희경의 시:선] 기억력에 대하여 [문화/ 2023-05-17]

그것 - 오은 무엇이 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이 있는 채로 무엇이 있다 이름을 모르는 채로 내가 있다 나는 골똘해지고 무엇도 덩달아 골똘하다 수수께끼를 내지도 않았는데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며칠 후 이름을 떠올린 채 허무해지는 내가 있다 (오은 시집 ‘없음의 대명사’) 기억력에 대하여 서점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환한 얼굴이 있다. 아는 얼굴이다. 반가워서 벌떡 일어났다.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혀끝을 맴맴 도는 자음 몇 개만 더듬다가 결국, 이름을 생략한 채 안부를 건넨다. 이게 얼마 만인가요. 잘 지냈지요. 그가 살 책을 고르기 위해 책장 앞에 선 다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기억해보려고 노력한다. 깜빡 잊는 것, 잃어버리는 것은 나의 천성이다. 숙제를 잊고 물건을 잃고 ..

[유희경의 시:선] 책장 넘기기 [문화/ 2023-05-10]

책장 넘기기 - 심지아 책장을 넘긴다 종이의 얇음을 넘긴다 앞면과 뒷면이 다르게 적히는 세계를 넘긴다 넘겨지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어서 위치를 표시할 수가 없다 돌아갈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매번 다른 곳이었다 (심지아 시집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 책장 넘기기 며칠 전 밤, 노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스스로 쓴 글씨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필까지는 아니어도 내세울 만한 필체는 아니었던 데다, 상황이 급하면 휘갈겨 적는 나쁜 습관이 있다. 분명 판매한 시집 제목이다. 계산하다 대충 적은 모양이다. 읽어내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동료를 붙들고 이 글씨가 무엇 같으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는 몇 가지 그럴듯한 추측을 내놨으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퍼뜩 설치해놓..

[유희경의 시:선] 식물 키우기 [문화/ 2023--05-03]

미래의 집 - 허주영 아래로 아래로 뻗어 내렸는지 뿌리는 뿌리에서 만나 최초의 커플처럼 곁에 머무른다 서로의 고독에 다가가는 춤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미래엔 식물이 집을 먹고 집은 숨을 내어 주지 (허주영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 식물 키우기 아버지에겐 농부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가꾸는 일을 저리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주말이면 토마토나 고추 같은 작물의 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한껏 공을 들여 키웠다. 어린 내 눈에는 그저 지루해 보였다. 시장에 가면 넘쳐나는 것들에 정을 쏟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내게 그 장면은 부모 마음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진다. 자라거나 자라지 않거나, 수확을 할 수 있거나 없거나 정성을 들이는 마음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유희경의 시:선] 표현하는 마음 [문화/ 2023-04-26]

뒤늦은 처음- 이하석 사랑이란 내겐 너무 늦은 시각이지만 더 처음의 발음이라서 그것에 대해 자꾸만 내 것이란 확인을 한다. 그래, 너는, 내게 마지막으로 온 처음의 젖은 흙이라네. 캄캄한 뜨거운 네 속에서 나를 응시하며 산딸나무 뿌리 일군다. (이하석 시집 ‘기억의 미래’) 표현하는 마음 ‘무심(無心)’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마음이 없음’이겠으나 과연 만물 무엇이든 마음이란 형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버젓이 사전에도 등재돼 있는 단어로, ‘감정이나 생각하는 마음이 없음’을 의미한다. 나는 꽤 무심한 편이다. 먼저 연락하거나 챙기는 법이 없다. 누군가 내게 유심해주기를 바라지 않으니 괜찮겠지 멋대로 믿으며 산다. 물론 무심해선 안 되는 대상도 있다. 이를테면 어..

[유희경의 시:선] 몸도 마음도 튼튼 [문화/ 2023-04-19]

마음 바닥의 가오리 - 손유미 마음이 지구젤리만 해졌을 때 마음 가오리는 찾아옵니다 마음 바닥을 낮게 날아 말랑한 바다를 느끼며 달래듯 어르고 어르듯 만져 살랑살랑 해류를 바꿀 듯 가오리 가오리 하네요 (손유미 시집 ‘탕의 영혼들’) 몸도 마음도 튼튼 생전 아버지께서 정한 우리 집 가훈은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이다. 초등학생 시절 매 학기 초 가정환경조사서에 이 아홉 글자를 적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너무 평범하고, 사실 촌스럽지 않은가. 그럴듯한 사자성어를 적어오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훗날 어른이 돼 가훈을 정해야 한다면, 보다 근엄한 명구로 정하리라 마음먹기도 했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고 보니, 이만한 가훈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삶이 별건가, 이 둘의 강건함만 있다면 못할 일이 무엇인가. 무엇..

[유희경의 시:선] 벚꽃엔딩 [문화/ 2023-04-12]

당인리 발전소 - 이은규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모르겠고 나는 해맑을래 지난봄을 깨끗이 잊고 피어오르는 저 벚꽃을 흉내 낼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 아름다운 비문이 마구마구 피어나도록 (이은규 시집 ‘무해한 복숭아’) 벚꽃엔딩 벚꽃이 져버리고 말았다. 한창이어야 할 때에. 지구 환경의 급변으로 다들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다. ‘이럴 수 있나’ 싶었던 일들이 ‘그럴 수 있지’가 되어버릴 때. 그 쓸쓸함과 그로부터의 무상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뜩하고 섭섭해 속이 아플 지경이다. 벚꽃이 벌써 져버렸다니. 과장하자면 핀 줄도 몰랐다. 백번 양보해 허겁지겁 사느라 바빠서 그랬다. 그러니 내 탓이다 치자. 그렇대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짬을 내어, 진해나 하동..

[유희경의 시:선] 사람은 상상하는 동물이다. [문화/ 2023-04-05]

몬스터 일기2 - 김개미 아무리 희귀한 동물이 있다 해도 사람보다 신기하지는 않을 거다 그들은 무슨 말을 듣기에 혼자 벤치에 앉아서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고서도 무엇을 보기에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매만지는 걸까 (김개미 시집 ‘작은 신’) 사람은 상상하는 동물이다.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이가 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여기는 내가 운영하는 서점이고,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고른 책을 손에 쥐고 있는 손님이다. 벌떡 일어나서 그가 내민 책을 계산한다. 얼굴이 빨개졌으리라. 손님은 빙긋 웃더니 “혼잣말을 계속하시길래 통화 중이구나 생각했지요” 한다. 그 얘기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에게 전했더니, 좀 심하다는 것이다. 혼잣말만 하는 게 아니고 가끔 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