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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 130

[유희경의 시:선] 요즘 방식의 고요 [문화/ 2022-10-19]

고요는 씨앗이니 - 정현종 세속의 기준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러한 때의 고요, 세상과 절연한 듯한 그 고요 속에 마음은 오랜 병에서 회복되는 듯하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로 붐비는 회복, 고요로 광활하여 회복되는 마음…… 그 마음 실로 만능이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민감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느니. (정현종 시집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 요즘 방식의 고요 늦은 퇴근길. 버스에 앉아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조용한 버스 안에 천둥만 한 소리가 울려 잠은 싹 달아나고, 무색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고마운 사람들이네. 모른 척해주는구나. 지레짐작하다가 유심히 지켜보니 그게 아니었다. 저마다 귀에 꽂은..

[유희경의 시:선] 사물의 생명 [문화/ 2022-10-12]

생활감 - 조해주 낡을수록 좋은 형태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뒤축이 느슨해진 운동화처럼 버려도 버려도 돌아오는 상자가 있다 저주처럼 왜 아름다울까 고작 낡은 오르골일 뿐인데 묵직하고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가 더러 끊기고 무디기 때문이다 즐거웠던 오후는 이빨 빠진 엘피판이 되어 순간을 반복하고 (조해주 시집 ‘가벼운 선물’) 사물의 생명 대학 시절 사진이 필요해졌다. 세상엔 그런 필요도 있다. 그래서 서랍을 발명했나 보다 인간은. 잘 넣어두었을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 두었나 하는 것이다. 분명 본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다행인지 가진 서랍이 몇 없다. 요령껏 뒤적이다 보면 금방 찾겠지. 그러나 웬걸. 책상 서랍부터 난관이다. 그곳에는 오래 간직해온 별의별 물건이 다 있어서 나를..

[유희경의 시:선] 무심함에 대하여 [문화/ 2022-10-05]

냉담 - 김명리 냉담이라는 담이 있다 담의 위쪽 하늘가엔 미풍에 떠가는 염소구름들 카니발의 아침에 날아든 부고처럼 모든 대오에는 왜 장의행렬의 냄새가 나는지 자못 태평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의 휘몰아치는 마음의 그 물결 문양을 (김명리 시집‘바람 불고 고요한’) 무심함에 대하여 아버지 기일 당일엔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으니 산소엔 전날 가자고,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부끄러웠다. 실은 잊고 있었다. 중년이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나는 날짜에 맞춰 기념하는 일에 서투르다. 아무리 잘 포장해도 무심함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며, 마음 씀이란 기질이기보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되레 뻔뻔하게 굴고 말았다. 내 속셈을 잘 알고 있을 가족들은 그러나 모른 척 동의를 해줬다. 그리하여 나는 올해도 ..

[유희경의 시:선] 숙취 (문화/ 2022-09-28]

깜빡했어요 - 김기택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넘치기까지 할 건 뭐예요. 당신한테만 얘기했는데도 벌써 마룻바닥이 흥건해요. 깜빡했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정수기가, 물이, 아니 말이. 네네, 걱정 마세요, 지금 입에 주워 담고 있는 중이에요. (김기택 시집 ‘낫이라는 칼’) 숙취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누며 이를 닦고 머리를 감아도 씻지 않은 기분. 두통이나 울렁임이 술에서 비롯된 고통이라면, 어둑해진 마음은 어젯밤 쏟아놓은 말 때문이다. 애써 떠올려보려는 것은 어제 내가 했을지도 모르는 말실수에 대한 기억. 별일 없었던 것도 같고, 하나같이 찜찜하기도 하다. 돈 걱정 많은 친구에게 집값 얘긴 괜히 했다. 얼마 전 실연을 겪은 후배 앞에서 결혼식 다녀온 이야..

[유희경의 시:선] 휴일 [문화/ 2022-09-21]

휴일 - 전욱진 거울 앞에 나 아니고 노동이 서 있을 때 누군가 날 부르는데 노동이 고개 들 때 곱살갑게 식탁 앞에 앉아 있을 때 일인용 침대 위에 포개어 누울 때 그게 나의 내부를 계속 궁금해할 때 그래 나도 펑하고 보여줄까 고민할 때쯤 쉬는 날이 온다. (전욱진 시집 ‘여름의 사실’) 휴일 나는 목요일에 쉰다. 서점을 시작하고 처음 몇 년간은 쉬는 날이 없었다. 신기하고 한편 한심하다. 그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것이 열심히 일하는 거라고 착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병을 얻었다. 몸보다 마음이 아팠다. 작은 일에 상심하고 자주 화를 내게 됐다. “너 쉬지 못해서 그래.” 나보다 먼저 자영업에 뛰어든 친구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하루는 무조건 쉬기. 목요..

[유희경의 시:선] 사소함 속의 기쁨 [문화/ 2022-09-14]

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 - 문정희 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 햇살마다 눈부신 리본이 달려 있겠는가 아침저녁 해무가 젖은 눈빛으로 걸어오겠는가 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 고요가 풀잎마다 맺히고 벌레들이 저희끼리 통하는 말로 흙더미를 들추어 풍요하게 먹고 자라겠는가 돌들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바람을 따라 일어서겠는가 (문정희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사소함 속의 기쁨 한껏 집중하여 모니터를 보고 있던 중이다. “안녕하세요?” 화창한 인사가 건네져 온다. 퍼뜩 고개를 들어보니, 편집자 S다. 화들짝 놀란 것은, 불과 한두 시간 전에 그와 업무 메일을 주고받았던 까닭이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놀라셨죠?” 하고 묻는다. 나는 부랴부랴 자리를 권하고 커피를 제안하고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내가..

[유희경의 시:선] 가을, 주먹을 꼭 쥐어본다 [문화/ 22-09-07]

봄여름가을겨울 - 진은영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으로 열린 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만 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가을, 주먹을 꼭 쥐어본다 시를 쓰는 선배가 문자를 보내왔다. 꿈에 내가 나왔다면서. 좋은 꿈인 것 같다고 그랬다. “여름 동안 서점은 어땠니? 비도 많고 더워서 힘들었겠다. 가을이야. 독서의 계절. 좋아질 테니 힘내.” 하고 덧붙였다. 정말 좋은 일이 있으려나 은근 기대를 하다가 마지막 문장쯤에서는 슬쩍 새침해졌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닌 것 같아서. 6년 동안 서점을 하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가을은..

[유희경의 시:선] 쉰다는 것 (문화/ 2022-08-31]

정밀의 책 - 정화진 햇빛은 늘 강하고 섬세하단다 세상이 바둑판처럼 정교할 수는 없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의 나뭇잎이, 나뭇잎의 그늘이, 얼룩무늬 고양이와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짐승들을 토해내고 있을 때 벗은 나무와 바람을 제치며 -(정화진 시집‘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쉰다는 것 인근 소극장과 이런저런 행사들을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다. 덕분에 극장 매니저와 자주 만나 회의를 한다. 며칠 전에도 노트북을 펴놓고 마주 앉아서 일 얘기를 주고받다가, ‘너무 삭막한 거 아니야?’ 싶어졌다. 문득, “휴가는 어디로 다녀왔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휴가 다녀오지 않았어요. 길게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쉴 때 쉬어야죠!” 몰랐..

[유희경의 시:선] 쉽게 내다 버린 것들 [문화/ 2022-08-24]

히든 피스 - 이소연 그릇은 흩어지기 위해 모여 있다 그릇은 깨지기 위해 모여 있다 그릇이 쌓여 나보다 오래 가정을 지킨다 그토록 많은 그릇이 깨져도 멸종되지 않는 오목한 세계 품을 수 있는 세계에 종말이란 없다는 듯 - (이소연 시집 ‘거의 모든 기쁨’) 쉽게 내다 버린 것들 서점에 놓아두었던, 몇 없는 그릇 중 하나를 깼다. 사소한 불운 하나로부터 종일, 좋지 않은 일들을 생각하는 것은 나의 나쁜 습관 중 하나다. 고작 그릇 하나일 뿐인데. 망연히 서 있던 마음을 다잡고 일단 큰 조각부터 모아 본다. “고작 그릇 하나”라고? 아닐 것이다. 거기에 담겨 있던 온갖 기억을 떠올리다가 도리질을 치고 말았다. 물성(物性)이란 물질이 가진 성질을 뜻하는 단어다. 종별로 고유한 특징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쓸..

[유희경의 시:선] 지금이 미래 [문화/ 2020-08-17]

[유희경의 시:선] 지금이 미래 [문화/ 2020-08-17] 이야기를 깨뜨리기 - 김리윤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뚝뚝 흐르는 것으로부터 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을 향해 우리는 미래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다 뒤로 걸으면서 앞을 보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한쪽 현실을 바라보는 사이 또 다른 현실이 흔들리며 흩어지네 - ( 김리윤 시집 ‘투명도 혼합 공간’) 지금이 미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다음 며칠 후 전주에 있는 한 고등학교의 초청으로 강연을 가게 되었다. 큰일이 있고 나면, 확실하다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게 된다. 견고해 보이던 도로가 움푹 꺼진다든지, 맨홀 뚜껑이 사라져버린 것을 목격하고 나면 평소 안전하다 여겼던 기차 안에서 불안을 느끼거나, 차창의 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