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했어요 - 김기택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어요.
그렇다고 넘치기까지 할 건 뭐예요.
당신한테만 얘기했는데도 벌써 마룻바닥이 흥건해요.
깜빡했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정수기가, 물이, 아니 말이.
네네, 걱정 마세요, 지금 입에 주워 담고 있는 중이에요.
(김기택 시집 ‘낫이라는 칼’)
숙취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누며 이를 닦고 머리를 감아도 씻지 않은 기분. 두통이나 울렁임이 술에서 비롯된 고통이라면, 어둑해진 마음은 어젯밤 쏟아놓은 말 때문이다. 애써 떠올려보려는 것은 어제 내가 했을지도 모르는 말실수에 대한 기억. 별일 없었던 것도 같고, 하나같이 찜찜하기도 하다.
돈 걱정 많은 친구에게 집값 얘긴 괜히 했다. 얼마 전 실연을 겪은 후배 앞에서 결혼식 다녀온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사람을 흉보려던 건 아닌데, 그런 꼴이 되어버렸구나. 절로 한숨이 나오고,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기도 한다. 이만큼 나이가 들었으면 자제할 줄도 알아야지. 어둑해진 마음은 숫제 컴컴해져서 정오가 되기도 전에 오늘 하루는 망한 것 같다.
이런 아침 날씨는 왜 또 이렇게 화창한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내비칠 것만 같다. 그러나 좋은 것에는 눈이 가지 않고, 내가 술을 먹나 봐라. 말 많이 하나 봐라. 며칠 전에도 했던 다짐만 되새기는 것이다. 그때쯤엔 어제 함께했던 사람에게서 혹시 전날 실수한 것은 없었는지, 확인하는 문자가 오고, 그러면 나는 사람 다 똑같네 피식, 웃으며 그제야 아침을 시작한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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