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 - 문정희
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
햇살마다 눈부신 리본이 달려 있겠는가
아침저녁 해무가 젖은 눈빛으로 걸어오겠는가
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
고요가 풀잎마다 맺히고
벌레들이 저희끼리 통하는 말로
흙더미를 들추어 풍요하게 먹고 자라겠는가
돌들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바람을 따라 일어서겠는가
(문정희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사소함 속의 기쁨
한껏 집중하여 모니터를 보고 있던 중이다. “안녕하세요?” 화창한 인사가 건네져 온다. 퍼뜩 고개를 들어보니, 편집자 S다. 화들짝 놀란 것은, 불과 한두 시간 전에 그와 업무 메일을 주고받았던 까닭이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놀라셨죠?” 하고 묻는다. 나는 부랴부랴 자리를 권하고 커피를 제안하고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내가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일까, 내가 보낸 메일의 내용을 되짚어 떠올려보느라 분주해진다.
마침내 마주 앉아 나는 “갑작스럽게 어쩐 일이세요?” 묻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제게 기쁜 일 생기라고 하셨잖아요?” 되묻는다. 나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내 편에서 보낸 메일 말미에, 기쁜 일 생기는 오후 보내시라, 적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터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런 인사를 받고 나니 새삼 하루가 팍팍했다 여겨졌다는 것이다. 외근을 핑계로 짐을 챙겨 나와 보니, “너무 좋은 거 있죠. 하늘 높고 볕도 좋고. 거리 구석구석 하나하나 다 특별하고 예뻐 보이더라고요. 기분에 취해 이리저리 걷다가, 이런 게 기쁨이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왔어요. 선물을 주셨으니 답례를 해야죠.” 하고 웃었다.
그는 한가득 시집을 사서 서점을 떠났고 나는, 기쁨의 사소함과 어디서든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인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저녁 시간을 다 썼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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