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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유희경♣시 : 선

[유희경의 시:선] 쉰다는 것 (문화/ 2022-08-31]

설지선 2022. 8. 31. 13:17


    정밀의 책 - 정화진



    햇빛은 늘 강하고 섬세하단다
    세상이 바둑판처럼 정교할 수는 없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의 나뭇잎이, 나뭇잎의 그늘이, 얼룩무늬 고양이와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짐승들을 토해내고 있을 때
    벗은 나무와 바람을 제치며

    -(정화진 시집‘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쉰다는 것



인근 소극장과 이런저런 행사들을 함께 기획·운영하고 있다. 덕분에 극장 매니저와 자주 만나 회의를 한다. 며칠 전에도 노트북을 펴놓고 마주 앉아서 일 얘기를 주고받다가, ‘너무 삭막한 거 아니야?’ 싶어졌다. 문득, “휴가는 어디로 다녀왔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휴가 다녀오지 않았어요. 길게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쉴 때 쉬어야죠!” 몰랐다는 사실에 무색해서, 내 처지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속상해서 공연히 목소리를 높여 뻔한 소리를 덧붙였다. 그러자 그는 한숨 쉬듯 노트북을 덮고 묻는다. “시인님. 쉬는 게 무얼까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쉬는 게 뭔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실은 나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쉰다고 쉬었는데 여전히 피곤하고 집중도 잘 못한다. 대체, 잘 쉬는 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전화나 문자, 메일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일 따위는 잊은 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 골똘해졌다가 시간이 되어 헤어지고 말았는데.

한참 뒤에야 대답해줄 말이 생각났다. 쉰다는 거, 나무 그늘 아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해먹 같은 데면 더 좋겠죠. 날 좋고 바람이 시원해서, 무슨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써도 아무 생각이 찾아오지 않은 상태에 놓여서 간들간들, 흔들리고 있으면 그게 쉬는 거죠. 쉴 휴(休)자가 딱 그렇게 생겼잖아요. 나무 아래 사람. 다음번에 만나면 꼭 이렇게 이야기해줘야겠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