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2-2 김수호-조선가슴시 153

[문태준 따뜻한시] 돌멩이들 - 장석남(1965~) [조선/ 24-04-01]

돌멩이들 - 장석남(1965~ ) 바닷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바닷가에서 주워 온 돌이 몇 개 있다. 까만 돌의 표면에는 물결무늬가 흐르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을 것이다. 몽돌이며 모서리가 덜 깎인 돌, 그리고 조각돌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돌로 책장을 눌러놓거나 집 안 살림에 쓰는 물건의 평형을 맞추려고 아래를 받치기도 한다. 그러다 돌이 최초..

[최영미의 어떤 시]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동아/ 2023-12-25]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 -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 오래된 친구들을 잊어야 하나, 다시는 마음에 떠올리지 말아야 하나? 그토록 오래된 친구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그대여 (…) 우리 다정한 축배를 들자,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그래 너는 너의 술을 사고 나는 내 술을 살 거야! 우리 다정한 축배를 들자,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우리 둘은 언덕을 뛰어다니며, 아름다운 데이지 꽃을 꺾었지: 우리는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 로버트 번스가 스코틀랜드의 민요를 채록해 곡을 붙인 ‘올드랭사인’은 오늘날 세계인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다. 1896년 배재학당 학생들이 올드랭사인 선율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부른 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국가처..

[최영미의 어떤 시] 눈보라 - 문태준 (1970~) [조선/ 2023-12-11]

눈보라 - 문태준 (1970~)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눈보라’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눈보라가 두렵다기보다 신기했지만, 지금은 눈보라에 내 몸이 젖는 게 싫어 우산을 펼쳐든다. 그 매서운 눈 부스러기들을 정면으로 응..

[최영미의 어떤 시] 살얼음이 반짝인다/첫추위 - 장석남(1965 ~ ) [조선/ 2023-12-04]

살얼음이 반짝인다 / 첫추위 - 장석남 (1965~ )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은커녕 ‘논’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서워 멀리 도망갔다.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 갈 때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개 붙잡아 둬”를 애걸하곤 했는데, 내가 저를 무서워..

[최영미의 어떤 시] 인연 - 황인숙(1958~) [조선/ 2023-12-04]

인연 - 황인숙(1958~) 맨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 너는 키다리. 맨 뒷줄이 네 자리 아, 우리가 어떻게 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 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 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내 입은 벙글벙글. 마지막 두 행이 멋지다.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내 입은 벙글벙글”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친구를 보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친한 사람들은 멀리서도 서로 알아볼 수 있다. 중학교 동창, 오랜 벗들을 만날 때 나는 제일 편하다. 내가 뭘 잘못해도 친구들은 이해한다..

[최영미의 어떤 시]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조선/ 2023-11-27]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황폐해지는 내 피부를 보네. 그리고 이렇게 말하네. “하나님께서 차라리 내 심장을 저렇게 수척하게, 사그라지게 하셨더라면!” 그러면 차라리 점점 싸늘해지는 심장이 나를 괴롭힐 리 없으니, 나는 평온하게 영원한 안식을 외로이 기다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세월’은 나를 슬프게 하려고, 어떤 부분은 빼앗아 가고, 어떤 부분은 남겨 두네. 그리고 한낮의 두근거림으로 이 저녁의 허약한 뼈대를 흔드네. (윤명옥 옮김) 소설 ‘테스’로 유명한 토머스 하디는 시도 곧잘 썼다. 특히 연애시를 잘 썼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는 하디가 나이가 들어 어떤 여인에게서 느낀 연애 감정을 에둘러 표현한 시. 강렬한 맛은 없지만 천천히 음미하..

[최영미의 어떤 시] 감 - 허영자(許英子 1938~) [조선/ 2023-11-23]

감 - 허영자(許英子 1938~)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한 병을 들이부은 듯 가슴이 쓰렸다. 허영자 선생님은 현존하는 한국 시인 중에서 한국어의 맛과 향기를 가장 잘 구사..

[최영미의 어떤 시] 성성만(聲聲慢),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 이청조(李淸照, 1084~1155) [조선/ 2023-11-13]

성성만(聲聲慢),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 이청조(李淸照, 1084~1155)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쓸쓸하고 쓸쓸할 뿐이라 처량하고 암담하고 걱정스럽구나. 잠깐 따뜻하다 금방 추워지곤 하는 계절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가 없네(…) 온 땅에 노란 국화 쌓였는데 지독하게 말랐으니 이젠 누가 따 준단 말인가 창가를 지키고 서서 어두워지는 하늘 어떻게 홀로 마주할까 게다가 오동잎에 내리는 가랑비 황혼이 되어도 방울방울 그치지 않네. 이 광경을 어찌 시름 수(愁) 한 자로 마무리하랴 (류인 옮김) 중국 최고의 여성 시인이라는 이청조가 쓴 송사(宋词: 송나라의 문학 양식). 제목 앞에 붙은 ‘성성만(聲聲慢)’은 곡조 이름인데, 곡조명에 ‘만(慢)’이 붙으면 박자가 느린 곡에 맞추어 쓴 노래(가사)를 의미한다. ..

[최영미의 어떤 시] 새장에 갇힌 새(Caged Bird) -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조선/ 2023-11-06]

새장에 갇힌 새(Caged Bird) -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자유로운 새는 바람을 등지고 날아올라(...) 그의 날개를 주황빛 햇빛 속에 담그고 감히 하늘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한다. (...)좁은 새장에서 뽐내며 걷는 새는 그의 분노의 창살 사이로 내다볼 수 없다. 날개는 잘려지고 발은 묶여 그는 목을 열어 노래한다(...) 겁이 나 떨리는 소리로 잘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그의 노랫소리는 저 먼 언덕에서도 들린다.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에 대해 노래하기 때문이다(...) (강희원 옮김) 김승희 선생님이 엮고 쓴 책 ‘남자들은 모른다’에서 ‘새장에 갇힌 새’를 보자마자 마야 안젤루의 자서전 ‘나는 새장 속의 새가 왜 노래하는지를 안다(I Know Why the..

[최영미의 어떤 시] 날아가는 낙엽(Das treibende Blἁtter) - 헤르만 헤세 (1877~1962) [조선/ 2023-10-30].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ἁtter)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 마른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내 앞을 날아간다. 방랑도 젊음도 그리고 사랑도 알맞은 시기와 종말이 있다. 저 잎은 궤도도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만 가서 숲이나 시궁창에서 간신히 멈춘다. 나의 여로는 어디서 끝날까. (송영택 옮김) 내 나이 또래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독일 작가, 한국에서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소설로 더 알려졌지만 시도 곧잘 쓴 헤세. 중학생 시절에 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나는 ‘사춘기 혁명’이라고도 할 만한 충격을 받았다. 헤르만 헤세의 책을 빌려 읽지 않았다면 나는 작가의 길을 걷지 않았고 오늘날처럼 독립적이고 개성이 강하고 ‘불편한’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