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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 153

[최영미의 어떤 시] 호박(南瓜歎)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 2023-07-24]

호박 (南瓜歎)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장마비 열흘 만에 모든 길 끊어지고 성안에도 벽항(僻巷)에도 밥 짓는 연기 사라졌네 태학(太學)에서 글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문안에 들어서자 떠들썩한 소리 들려 들어보니 며칠 전에 끼니거리 떨어지고 호박으로 죽을 쑤어 근근이 때웠는데 어린 호박 다 따 먹고 (중략) 항아리같이 살이 찐 옆집 마당 호박 보고 계집종이 남몰래 도둑질하여다가 충성을 바쳤으나 도리어 야단맞네 (중략) 작은 청렴 달갑지 않다 이 몸도 때 만나면 출세 길 열리리라 안 되면 산에 가서 금광이나 파보지 만 권 책 읽었다고 아내 어찌 배부르랴 (후략) (송재소 옮김) 정약용이 22세에 지은 한시인데 소설 장면처럼 사실적이고 표현이 치밀하다. 장마를 소재로 다산은 시를 여러 편 지었는..

[최영미의 어떤 시] 우산 - 박연준(1980~) [조선/ 2023-07-17]

우산 - 박연준(1980~)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우산을 소재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이 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깜찍하고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에서 젊음이 느껴진다. 시인은 우산이 되어, 비를 기다리는 우산의 마음을 헤아린..

[최영미의 어떤 시] 꿈같은 이야기 - 김시종(1929~) [조선/ 2023-07-10]

꿈같은 이야기 - 김시종(1929~) 내가 뭔가 말하면 모두가 바로 웃으며 달려들어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마” 해서 나조차도 그런가 싶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꿈꾸려 한다 그런 터라 이제 친구들은 놀리지도 않는다 “또 그 이야기야!” 하는 투다 그런데도 꿈을 버리지 못해서 나 홀로 쩔쩔매고 있다. (곽형덕 옮김) 나도 내 꿈을 여태 버리지 못해서 홀로 쩔쩔매고 있다. 버릴 수 있다면 꿈이 아니겠지. 꿈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다”라는 묵직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의 시집 ‘지평선’에서 내가 가장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

[최영미의 어떤 시] 장마 - 천상병(1930~1993) [조선/ 2023-07-03]

장마 - 천상병(1930~1993)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深夜)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 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천상병 시인이 서른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한 시. 어이하여 그처럼 젊은 나이에 용서를 알게 되었나. 그의 인생 역정을 내가 다 알까마는, 내려치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으며 ‘용서’를 빌 만큼 시인이 부모나 가족, 친구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을까. 가난이 죄였겠지. 우리 몸의 아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어떤 시는 우리를 치유하고, 순진무구한 어떤 시는 종교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천상병의 ..

[최영미의 어떤 시] 행복 2 - 나태주(1945~) [조선/ 2023-06-26]

행복 2 - 나태주(1945~)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집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삶의 질은 너무 다르다. 집은 쉬는 곳이다. 쉬어야 인간은 산다. 내 집이 있다면,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도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를 언제 쓰셨을까? ‘행복 1′보다 나중에 썼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행복 1′을 찾아보았다.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는/ 뚱뚱한 아내를 바라볼 때/ 잠시 나는 행복하다/ (…) / 꿈꾸는 듯 귀여운 작은 숙녀/ 딸아이를 바라볼 때/ 나는 잠시 더 행복하다.”(나태주 ‘행복 1′) 지금도 행복을 그..

[최영미의 어떤 시] 주먹 - 이시카와 다쿠보쿠(1886~1912) [조선/ 2023-06-12]

주먹 - 이시카와 다쿠보쿠(1886~1912) 나보다 부자인 친구에게 동정받아서 혹은 나보다 강한 친구에게 놀림당해서 울컥 화가 나 주먹을 휘둘렀을 때, 화나지 않는 또 하나의 마음이 죄인처럼 공손히 그 성난 마음 한편 구석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덥지 못함. 아아, 그 미덥지 못함. 하는 짓이 곤란한 주먹을 가지고, 너는 누구를 칠 것인가. 친구인가 너 자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 죄 없는 옆의 기둥인가. (손순옥 옮김)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치함) 가난한 생활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시인이 귀엽다. 다쿠보쿠의 시에서 내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치밀한 묘사, 자신을 치열하게 들여다보는 눈이다. 친구에게 화가 나 주먹을 휘두른 뒤 자신을 반성하고 분석하는 눈, 현대인의..

[최영미의 어떤 시] 6월의 밤(June Night) [조선/ 2023-06-05]

6월의 밤(June Night) 오 대지여, 너는 오늘밤 너무 사랑스러워 비의 향기가 여기저기 떠돌고 멀리 바다의 깊은 목소리가 땅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내 어떻게 잠들 수 있으리오? 오 대지여, 너는 내게 모든 것을 주었지, 널 사랑해, 사랑해--오 나는 무엇을 가졌나? 너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건- 내가 죽은 뒤 나의 육신밖에 없네. - 사라 티즈데일(Sara Teasdale, 1884~1933) 가슴을 찌르는 마지막 행이 없다면 그렇고 그런 밋밋한 시가 되었을 텐데, 역시 사라 티즈데일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아말휘의 밤 노래(Night Song at Amalfi)’를 읽은 뒤 그녀의 시에 매료되어 아말휘 바닷가를 찾아갔던 젊은 날이 떠오른다. 사라 티즈데일도 나처럼 바닷..

[최영미의 어떤 시] 가는 봄이여 - 마쓰오 바쇼(1644~1694) [조선/ 2023-05-29]

가는 봄이여 - 마쓰오 바쇼(1644~1694) 가는 봄이여 새 울고 물고기의 눈에는 눈물 (김정례 옮김) 하이쿠(일본의 짧은 정형시)가 촘촘히 박혀있는 바쇼의 기행문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다시 읽었다. 친하게 지내던 이들과 헤어져 여행을 떠나는 감회를 적은 ‘가는 봄이여’에서 가장 뜨거운 단어는 ‘눈물’이다. 바쇼의 글에는 ‘눈물’이 자주 나온다. 눈물이 많아지는 나이 46세에 제자 소라와 함께 에도(도쿄)를 떠난 바쇼는 2400킬로미터 먼 길을 걸어서 여행했다. ‘눈물’은 하급무사 출신 방랑시인 바쇼의 서민적 성정을 드러내는 특징일 수도 있다. ‘새 울고’로 자신의 울음을 감추고 얼마나 슬프면 물고기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을까.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소리 - 마쓰오 바쇼 조용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최영미의 어떤 시] [121] 바퀴(The Wheel) - 예이츠 (W. B. Yeats 1865~1939) [조선/ 2023-05-22]

바퀴(The Wheel) - 예이츠 (W. B. Yeats 1865~1939)  겨울이면 우리는 봄을 찾고봄이 오면 여름을 애타게 부르며생울타리가 이곳저곳 둘러쳐질 때면겨울이 최고라고 선언한다;그다음에는 좋은 것이 없다왜냐하면 봄이 오지 않았기에-우리의 피를 휘저어 놓는 건무덤에 대한 갈망뿐임을 알지 못한다.   인생의 바퀴, 자연의 순환을 암시하는 ‘바퀴’라는 제목이 절묘하다. 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가을’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더 좋은 상태를 바라며 생을 보내다 갑자기 우리는 깨닫는다.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이 최고였다는 사실을. 가을이 되어서야 부족해 보였던 봄과 여름이 나름 찬란했음을 아프게 깨달으리.‘우리의 피를 휘젓는 건 무덤에 대한 갈망’이라니,..

[최영미의 어떤 시] 아담의 자손들(Bani Adam) - 사디 시라즈 [조선/ 2023-05-15]

아담의 자손들(Bani Adam) - 사디 시라즈(Saadi Shirazi 1210~1291?) 동일한 본질로부터 창조된 아담의 자식들은 서로 연결된 전체의 일부분이다. 한 구성원이 다치고 아플 때, 다른 사람들은 평화로이 지낼 수 없다.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다.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가 쓴 ‘장미정원(Gulistan)’에 나오는 ‘바니 아담(Bani Adam)’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다지 매료되지 않았다. 인류애를 노래하는 시들은 많다. 시의 발상이 “어떤 이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는 존 던(John Donne)의 문장을 연상시킨다. 존 던보다 350여 년 전, 인류애라는 개념이 희박하던 13세기에 페르시아 시인이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