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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 153

[최영미의 어떤 시] 밤눈 - 김광규(1941~) [조선/ 2022-12-12]

밤눈 - 김광규(1941~)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사랑이란 서로의 바깥이 되는 것. 편안하게 읽히나 깊은 여운을 남기는 시. 복잡한 비유나 상징이 없어도 이렇게나 감동적이고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다. 겨울 여행을 며칠 앞두고 ‘밤눈’을 읽었다. 겨울밤 노천 역이 얼마나 춥고 을씨년스러운지, 밤늦게 서울역에 내려본 사람은 알리라. 저 멀리 보이는 따스한 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전동차에 올라타 기어이 내 방에 도착했을 때, 칼바람을 막을 집이 있다는 행운에 나는 감사했다. 이 시가 수록된 김광규 선..

[최영미의 어떤 시] 테오그니스 (기원전 570~485년경) [조선/ 2022-12-05]

테오그니스 제우스도, 비를 뿌려도 뿌리지 않아도 모두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 자신이 달라붙어 있는 돌들과 비슷해지는 형체 없는 말미잘의 방식을 받아들여라 너 자신의 색깔을 시간과 기회에 맞추어라 (…)사멸하는 인간 모두는 과오로 더럽혀져 있다. 퀴르노스여.(…) 혹독한 고난이 네게 닥쳤는지 보이지 말라 왜냐하면 고통의 무게를 보인다면 위기의 너를 도와줄 자 없으리다(…) 정신 맑은 사람들 속에 술 취한 것은 세련되지 못한 일. 술자리에서 정신이 맑은 것도 세련되지 못한 일. - 테오그니스 (기원전 570~485년경) (김남우 옮김) 테오그니스(Theognis)는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시인. 그가 사랑하는 소년 퀴르노스에게 바친 교훈시에는 현대인도 새겨들을 만한 격언이 많다. 너의 고통을 남..

[최영미의 어떤 시] 정의는 축구장에만 있다 - 최영미 (1961~) [조선/ 2022-11-28]

정의는 축구장에만 있다 - 최영미 (1961~) 컴퓨터를 끄고 냄비를 불에서 내리고 설겆이를 하다 말고 내가 텔레비전 앞에 앉을 때,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느 소년도 총을 내려놓고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몸은 서로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며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그들의 경기는 유리처럼 투명하다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어느 선수가 심판을 속였는지, 수천만의 눈이 지켜보는 운동장에는 위선이 숨을 구석이 없다 하늘이 내려다보는 푸른 잔디 위에 너희들의 기쁨과 슬픔을 묻어라 2005년에 출간한 시집 ‘돼지들에게’에 실린 시. 이 시를 쓸 무렵 나는 혈기왕성한 사십대였고, 길을 가다 공이 내 앞에 굴러오면 공을 차고 싶어 발이 근질거렸고,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는 문단 권력에 대해 분노했..

[최영미의 어떤 시] 나무들(Trees) - 조이스 킬머(Joyce Kilmer 1886~1918)[조선/ 2022-11-21]

나무들(Trees) - 조이스 킬머(Joyce Kilmer 1886~1918) 한 그루 나무처럼 사랑스러운 시를 나는 결코 볼 수 없을 거야. 그 굶주린 입술은 대지의 가슴에서 흐르는 달콤한 물을 재빨리 빨아들이지 하루 종일 하느님을 쳐다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여름이면 자신의 머리 위에 울새들의 둥지를 마련해주는 나무 그 너그러운 가슴에 눈이 내려앉고 빗방울과 친하게 지내는 나무 시는 나 같은 바보들이나 만들지만, 오직 하느님만이 나무를 만들 수 있지 ‘시는 나 같은 바보들이나’를 읽으며 가슴속이 다 시원해진다. 이런 갑작스러운 통쾌함, 시가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시에 등장하는 나무는 대지로부터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굶주린 입”과 팔, 머리(hair)와 가슴을 가진 여인으..

[최영미의 어떤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1937~2007) [조선/ 2022-11-14]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1937~2007)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치함) 한국어로 쓰여진 가장 뛰어난 반전 반핵(反戰反核) 평화의 시. 이 세상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청춘을 보낼 것인가. 애국을 외치고 총을 쏠 그 시간에 무지개를 사랑하고 연인들과 소곤거리며 더 많은 것들을 아끼고 사랑하..

[최영미의 어떤 시] 바지락 - 이시가키 린(1920~2004) [조선/ 2022-11-07]

바지락 - 이시가키 린(1920~2004) 야밤에 눈을 떴다. 엊저녁에 산 바지락들이 부엌 구석에서 입을 벌리고 살아 있었다. “날이 새면 모조리 먹어치울 거야.” 마귀할멈처럼 나는 웃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입을 약간 벌리고 자는 것밖에 내 밤은 없었다. (유정 옮김) 깜찍한 발상이로군. 감탄하며 하하 웃은 뒤에 쓴맛이 감돈다. 시에 스며있는 페이소스에 공감하며 나는 시인이 여성임을, 혼자 사는 여성임을 알아차렸다. 야밤에 깨어나 눈을 뜨고 본 것이 하필 ‘바지락’이었다니. 침대와 부엌이 한 공간에 있어, 방금 깨어나 침침한 눈에 생명체의 살아있는 입이 포착되어 민감하게 반응한 게 아닌가. 자다 깨어 바지락을 보고 ‘저것들이 상하지 않을까? 냉장고에 넣어야지’ 따위의 걱정이 아니라 “날이 새면 모조리..

[최영미의 어떤 시] 그리움 - 유치환 (1908~1967) [조선/ 2022-10-31]

그리움 - 유치환 (1908~1967)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그리움’은 유치환 선생의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1939년)에 수록된 시.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라고 노래했던 바위의 시인이, 남성적이고 의지적인 시로 유명한 청마 선생이 쓴 서정시다. 너를 잃고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다는 표현이 절절하다. 푸른 말처럼 뛰놀던 젊음. 꽃 같은, 꽃처럼 아름다웠던 아이들이 죽었다. 이태원 참사 뉴스를 일요일 아침에 외신..

[최영미의 어떤 시] 저녁에 - 김광섭(1905~1977) [조선/ 2022-10-24]

저녁에 - 김광섭(1905~1977)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설명이 필요 없는 좋은 시. 서울에 살면서 별 보기가 힘들다. 밤하늘이 탁해 별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하거니와, 세상 살기에 급급해 ‘별’을 딱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별은 기를 쓰고 본다. 얼마 전, 미국의 항공우주국이 소행성 다이모르포스에 우주선을 충돌시켜 소행성의 궤도를 바꾸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인류 최초로 천체의 움직임을 바꾸었다, 지구 방어 실험에 성공했다고 환호하는 과학자들을 보며 걱정이 앞섰다. 우..

[최영미의 어떤 시] 도봉(道峯) - 박두진(1916~1998) [조선/ 2022-10-17]

도봉(道峯) - 박두진(1916~1998)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중략)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청록파의 한 분이었던 박두진 선생이 쓴 10연의 시인데, 지면이 모자라 행을 붙여 배열했다. ’도봉’을 처음 읽었을 때 내 관심을 끈 것은 자연 묘사가 두드러지는 앞이 아니라, 생의 쓸쓸함을 토로하는 뒤의 3연이었다. “생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에 감전된 나는 시인이 노년에, 오십대가 지나 쓴 시라고 예단했다. 생의 쓸쓸함을 ..

[최영미의 어떤 시]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Who Has Seen the Wind?) -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 [조선/ 2022-10-10]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Who Has Seen the Wind?) -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 나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지: 그러나 나뭇잎들이 흔들릴 때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거지.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지: 그러나 나무들이 고개를 숙일 때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거지 이 시를 보고 아하! 감탄한다면 당신은 아직 순수를 잃지 않은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바람의 실체를 본 사람은 없다.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시들은 ‘이브의 딸’이나 ‘노래’처럼 대개 우울하고 어두웠는데, 그녀의 시 세계는 넓고 깊어서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처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귀여운 시가 꽤 있다. ‘Who Has Seen the Wind’는 훗날 노래로 만들어져 영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