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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 153

[최영미의 어떤 시] 할아버지 - 정지용(1902~?) [조선/ 2023-05-08]

할아버지 - 정지용(1902~?)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날도 비가 오시네. 외래어는 하나도 쓰지 않고, 한자어도 없이 순수한 우리말로만 쓴 아름답고 재미난 동시. ‘도롱이’ 대신 우산을 쓰며 우리가 잃어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한다. “하늘이 시커머니 어째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하던, 귀신처럼 정확했던 그분들의 일기예보가 그립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정지용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여 참신한 이미지와 정제된 언어가 돋보이는 시를 썼다. 일제강점기에 이토록 향토색이 진한 서정시를 쓴 시인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지용은 6·25 전쟁이 터진 뒤 피란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었는..

[최영미의 어떤 시] 팬케이크를 반죽해요 -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조선/ 2023-05-01]

팬케이크를 반죽해요 -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팬케이크 반죽을 섞어요, 반죽을 휘저어요, 팬에 올려 놓으세요; 팬케이크를 지지고 익혀요, 팬케이크를 던져서 뒤집어요-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세요. (Mix a Pancake) Mix a pancake, Stir a pancake, Pop it in the pan; Fry the pancake, Toss the pancake— Catch it if you can. - Christina Rossetti(1830~1894) 이런 것도 시가 되는구나. 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시를 쓴 로제티(Christina Rossetti)는 얼마나 많은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었을까. 동사와 목적어로 이뤄진 짧은 시인데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 행 “C..

[최영미의 어떤 시] 봄 (Spring) - 빈센트 밀레이(1892~1950) [조선/ 2023-04-24]

봄 (Spring) - 빈센트 밀레이(1892~1950) 무슨 목적으로, 4월이여 너는 다시 돌아오는가? 아름다움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크로커스의 뾰족한 끝을 지켜보는 나의 목덜미에 닿는 햇살이 뜨겁다. 흙 냄새가 좋다. 죽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람의 뇌는 땅 속에서만 구더기에 먹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무(無),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해마다, 이 언덕 아래로, 4월이 재잘거리며,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최승자 옮김) 나는 햇살만으로 충분한데, 빈센트 밀레이는 욕심이 많네.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4월. 우리 생애 이처럼 화창한 봄날이 다시 또 올까 싶게 아름다운 4월의 어느 날, 봄을 열었으나 봄에 ..

[최영미의 어떤 시]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 김경미(1959~) [조선/ 2023-04-10]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 - 김경미(1959~) 필 때 한 번 흩날릴 때 한 번 떨어져서 한 번 나뭇가지에서 한 번 허공에서 한 번 바닥에서 밑바닥에서도 한 번 더 봄 한 번에 나무들은 세 번씩 꽃 핀다 앙증맞고 순발력이 뛰어난 시. 꽃이 피어났다 흩날리다 떨어지는 찰나를 잡아서 언어의 꽃을 피웠다. 언어를 다루는 오랜 관록에서 우러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솜씨가 돋보인다. 피는가 싶었는데 벌써 지려고 시들시들….어떤 꽃을 보고 이런 예쁜 시를 썼을까? 목련은 아닌 것 같고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니고, 벚꽃이 눈앞에 하늘거린다. 비처럼 허공에 휘날리는 벚꽃이 절정으로 치닫는 요즘, 슬픔 없이 봄을 음미할 수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처음 발표된 시다. ..

[최영미의 어떤 시] 장 소부(張少府)에게 회답하다 - 왕유(王維 701~761) [조선/ 2023-04-03]

장 소부(張少府)에게 회답하다 - 왕유(王維 701~761) 늘그막에 조용한 것만 좋아하게 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어졌네. 돌이켜 보면 특별한 방책이 없다 보니 고향 산림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불어오는 솔바람에 허리띠를 풀고 달빛 비치는 산 위에서 거문고 타네. 그대 곤궁에 달관하는 이치를 묻는가 강어귀 깊숙한 곳 어부 노래 들어보게 (류인 옮김) 이백, 두보와 더불어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왕유가 그의 친구인 장 소부(‘소부·少府’는 현령을 보좌하는 벼슬아치)에게 쓴 답시. 달빛 비치는 산 위에서 거문고를 타는 시인은 그다지 곤궁해 보이지 않는다. 왕유는 시만 아니라 그림과 음악에도 능한 예술가였다. 5행과 6행의 빼어난 자연 묘사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마지막 행에 나오는 ..

[최영미의 어떤 시] 스팸메일 - 사가와 아키(佐川亞紀 1954~) [조선/ 2023-03-27]

스팸메일 - 사가와 아키(佐川亞紀 1954~) 소금에 절여진 혀가 죽음을 핥는다(…) 통조림에 꾸역꾸역 채워 넣은 분홍빛 주검 (...)오키나와에 집중된 통조림 스팸 소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진절머리 나는 전쟁의 맛(...) 나도 보낼 테다 스팸메일을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에게 끝내 이름조차 알지 못할 사람에게 바로 스팸메일을 보내버릴 테다 인간의 어떤 본질이 선명하게 어린 메일을 대량으로 받아 보겠지 진절머리 나는 군용식품의 참을 수 없는 질문 같은 메일을 (한성례 옮김) 스팸 햄을 먹으며 통조림에 채워 넣은 분홍빛 주검을 떠올리고, 전쟁 시의 비상 분쇄육 식품에서 ‘시대의 식도(食道)’를 읽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전해준 ‘스팸’이라는 햄..

[최영미의 어떤 시] 지극한 즐거움을...[조선/ 2030-03-20]

지극한 즐거움을 읊어 성중에게 보이다 -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뜰의 꽃 흐드러져도 보고 싶지 않고 음악 소리 쟁쟁 울려도 아무 관심 없네 좋은 술과 예쁜 자태에도 흥미 없으니 참으로 맛있는 것은 책 속에 있다네 (강혜선 옮김) ‘성중(成仲)’은 이 시를 지은 선조 시대 문인인 유희춘의 부인 송덕봉의 다른 이름이다.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은 책에 있다고 자랑하는 남편의 시를 읽은 송덕봉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3행의 “예쁜 자태에도 흥미 없으니”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아내는 책에 빠져 꽃도 보고 싶지 않다는 남편을 책망하는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화답했다. 차운하다(次韻) - 송덕봉(1521~1578) 봄바람 아름다운 경치는 예부터 보던 것이요 달 아래 거문고 타는 것도 한 가지 한가로움이지요..

[최영미의 어떤 시]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 - 릴케 (1875~1926) [조선/ 2023-03-13]

해넘이의 마지막 인사 -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6) 거룩한 태양이 녹아들고 있었다. 하얀 바다 속으로 뜨겁게- 바닷가에 수도사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금발의 젊은이와 백발의 늙은이가. 늙은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쉬게 되리라. 이렇게 편안히- 젊은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영광의 광채가 내리기를. (송영택 옮김) 릴케가 이런 시도 썼구나. 연약하고 낭만적인 감수성의 시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릴케의 시 세계는 바다처럼 넓고 깊다. 해가 넘어가는 황혼 무렵, 바닷가에 앉은 두 수도사를 (아마도 뒤에서) 바라보며 이런 거룩하고 심오한 생각을 하다니. 4행에 나오는 ‘금발의 젊은이’가 재미있다. 우리나라 시인이라면 ‘흑발의 젊은이’라고 했을 텐데, 유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