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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 153

[최영미의 어떤 시] 마음속의 가을 - 롱펠로(1807~1882) [조선/ 2022-10-03]

마음속의 가을(Autumn Within) - 롱펠로(H.W. Longfellow 1807~1882) 가을이다. 바깥이 아니라 내 마음속이 쌀쌀하다 누리에 젊음과 봄이 한창인데, 나만 홀로 늙어버렸다. 새들이 허공을 날아다니고, 쉴 새 없이 노래하며 집을 짓는다. 곳곳에서 생명이 꿈틀대고 있다. 나의 외로운 가슴속을 빼고는 거기만 고요하다. 죽은 잎들 떨어져 바스락거리다 잠잠해진다. 보리타작하는 소리도 그치고, 방앗간의 웅얼대는 소리도 멎었다. (김천봉 옮김) 내 속의 가을을 절절하게 묘사한 시. 밖은 젊음의 활기로 가득한 봄인데, 내 마음속은 죽은 잎처럼 고요하다. 내 안과 바깥 풍경의 대비를 통해 내 안의 쌀쌀함이 더 두드러진다. 8행에 나오는 ‘외로운’이라는 형용사를 빼면 시가 어떻게 될까? 더 절제..

[최영미의 어떤 시] 푸르른 날 - 서정주(1915~2000) [조선/ 2022-09-26]

푸르른 날 - 서정주(1915~2000)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송창식의 노래로 유명한 시. 아예 노래를 만들라고 지은 시 같다. 4행의 ‘초록이 지쳐’와 3행의 ‘저기 저기 저’는 똑같이 5음절. 가을 꽃 자리를 가리키려면 ‘저기 저’로 충분한데, ‘저기’를 한번 더 반복해 뒤에 오는 행과 운율이 완벽해졌다. 여고 시절 나의 애송시를 손으로 베껴 쓰다 “가을 꽃 자리” 뒤에 ‘초록이 짙어’를 입력하고는 아차! 내 기억의 잘못을 발견했다. ‘짙어’가 아니라 ‘지쳐’가 맞는다..

[최영미의 어떤 시] 슬픔(Sorrow) - 빈센트 밀레이(Vincent Millay 1892~1950) [조선/ 2022-09-19]

슬픔(sorrow) - 빈센트 밀레이(Vincent Millay 1892~1950) 슬픔은 쉬임 없는 비처럼 내 가슴을 두드린다 사람들은 고통으로 뒤틀리고 비명 지르지만, 새벽이 오면 그들은 다시 잠잠해지리라. 이것은 차오름도 기울음도 멈춤도 시작도 갖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옷을 차려 입고 시내로 간다. 나는 내 의자에 앉는다. 나의 모든 생각들은 느리고 갈색이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아무래도 좋다. 혹은 어떤 가운 아니면 어떤 구두를 걸치든. (최승자 옮김) 이렇게 아름답게,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슬픔을 노래하다니. 미국의 여성 시인 빈센트 밀레이의 시적 능력에 어떠한 찬사도 부족하리라. 절묘한 각운과 밀도 높은 언어들, 꽉 짜인 구성…무엇이 그녀를 슬프게 하는지, 직접적인 설명은 피하면서 독자들을..

[추석에 읽는 최영미의 어떤시]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1903~1950) [2022-09-11]

[추석에 읽는 최영미의 어떤시]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1903~1950) [2022-09-11]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1903~1950) “오-매 단풍들것네” 장관에 골붉은 감닢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참 깜직하고 귀엽고 아련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는 이런 시 못 쓴다. 보통의 서정시는 이미지에서 심상을 전개하는데 “오-매 단풍들것네”는 정겨운 사투리 한 문장으로 시작해 시 한편을 이루었다. 같은 말이 세 번 반복되었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장광’은 ‘장독대’를 뜻하는 전라도 방언이다. 5행의 ‘기둘리리’는 ‘기다리리’를 뜻한다. ‘오-매’를..

[최영미의 어떤 시] 누구의 죄 - 이반 투르게네프 [조선/ 2022-09-05]

누구의 죄 -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 그녀는 정답고 파리한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그러나 나는 무뚝뚝하게 그 손을 떨쳐버렸다. 그 젊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당혹해하는 빛이 감돌았다. 그 젊고 선량한 두 눈이 책망하듯 나를 바라본다. 그 젊고 순결한 마음으로는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거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그녀의 입술이 속삭인다. (…) 네가 지은 죄는 나에게 적은 것은 아니다. 네가 이해할 수 없고, 나도 네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거운 죄를 너는 알고 싶으냐? 「그럼 말하마--너의 청춘, 나의 노년」 (김학수 옮김) 마지막에 급소를 찔린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의 노년’ 그 한마디를 하려고 서두가 길었구나. 처음부터 답을 말하면 재미가 없지. 짧은 소설 같은 구성, 구어체의..

[최영미의 어떤 시] 가난(歎貧) - 정약용(丁若鏞) [조선/ 2022-08-29]

가난(歎貧)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안빈낙도(安貧樂道)하리라 작정했지만 막상에 가난하니 그게 안 되네 마누라 한숨 소리에 낯빛을 잃고 굶주리는 자식에게 엄한 교육 못하겠네 꽃과 나무 모두 다 생기를 잃고 책 읽어도 글을 써도 시들하기만 부잣집 담 밑에 쌓인 곡식은 들 사람들 보기에 좋을 뿐이네 (송재소 옮김) 7행의 “부잣집 담 밑에 쌓인” 곡식은 한시 원문에 의하면 ‘보리(麥)’다. 쌀이라면 모를까 보리를 부러워했다니. 다산의 어려운 처지와 당시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난(歎貧)’을 쓰기 1년 전인 1794년에 다산은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 지방을 순찰하며 굶주린 백성들을 많이 보았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 가기 전에 작은 벼슬을 했지만 청렴한 그의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

[최영미의 어떤 시] 저주 - 김명순(1896~1951) [조선/ 2022-08-22]

[최영미의 어떤 시] 저주 - 김명순(1896~1951) [조선/ 2022-08-22] 저주 - 김명순(1896~1951) 길바닥에 구르는 사랑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 나와 사람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내가 미덥지 않은 미덥지 않은 너를 어떤 날은 만나지라고 기도하고 어떤 날은 만나지지 말라고 염불한다 속이고 또 속이는 단순한 거짓말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서 눈먼 이의 손길에 부서지는 것아 내 마음에서 사라져라 오오 ‘사랑’이란 거짓말아! 사랑을 꿈꾸는 이 땅의 소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이 백여 년 전에 이런 시를 썼다. 이렇게 사랑을..

[최영미의 어떤 시] [83] 병 - 사토 하루오(1892~1964) [조선/ 2022-08-15]

[최영미의 어떤 시] [83] 병 - 사토 하루오(1892~1964) [조선/ 2022-08-15] 병 - 사토 하루오(1892~1964) 태어난 제 나라를 부끄러워하는 것. 지나간 사랑을 한탄하는 것. 부정하기를 너무 좋아하는 것.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술잔 들고 술 깬 후의 슬픔을 미리 생각하는 것. (유정 옮김) 어떤 일본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 정서가 비슷해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시인들과는 다른 마음의 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이 마음 바닥을 건드린다. 패배한 자의 슬픔이라고 할까? 동아시아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개인의 좌절감. 제 나라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부정하기를 좋아하나 현실을 바꿀 힘은 없고, 지나간 사랑을 한탄..

[최영미의 어떤 시] 숲 - 강은교(姜恩喬·1946~) [조선/ 2022-08-08]

[최영미의 어떤 시] 숲 - 강은교(姜恩喬·1946~) [조선/ 2022-08-08] 숲 - 강은교(姜恩喬·1946~)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이렇게’를 넣은 것이 신의 한 수. 시의 방관자였던 독자들이 ‘이렇게’를 보며 적극적인 행위자로 동참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나무들이 흔들리는 숲에서 나도 따라 흔들리는 것처럼, 내가 나무 넷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착시.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

[최영미의 어떤 시] 수박을 기리는 노래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 [조선/ 2022-08-01]

[최영미의 어떤 시] 수박을 기리는 노래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 [조선/ 2022-08-01] 수박을 기리는 노래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 찌는 여름의 나무 (…) 황색 태양, 지쳐 늘어짐 (…) 목은 탄다, 이도 입술도, 혀도: 우리는 마시고 싶다 폭포를, 검푸른 하늘을, 남극을, 그런 뒤 제일 찬 것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들을, 그 둥글고 멋지고, 별 가득한 수박을, 그건 목마른 나무에서 딴 것. 그건 여름의 초록 고래. (…) 물의 보석 상자, 과일 가게의 냉정한 여왕, 심오함의 창고, 땅 위의 달! 너는 순수하다 네 풍부함 속에 흩어져 있는 루비들, 그리고 우리는 너를 깨물고 싶다 (정현종 옮김)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