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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김수호-창작학습시/김수호♡미발표시 - 2 153

낙엽 덮인 산책길 - 김수호 (1940~ )

낙엽 덮인 산책길 - 김수호 (1940~ ) 진 갈색 한 빛깔뿐이면 수채화 화폭이 아니면 바삭바삭 박자 맞춰 주지 않으면 낙엽 덮인 산책길이 얼마나 지루하고 초라할까 노랑부터 주황으로 빨강에서 주홍까지, 거기에 억지로 흔들어 떨어뜨린 푸른 잎이 간간이 섞이며 도는 생기 바가지 쓰고 쌩쌩 달리는 타이어 때묻은 자전거 전용도로에 휩쓸리는 휴지쪽이 무슨 콧노래를 불러내던가 빈 가지 틈새로 손 뻗고 햇빛이 그리는 수채화를 내려보며 어울려 숨쉬노라면 가을의 굽은 어깨 너머 겨울이 찡하게 코끝을 찌른다. (23-11-07)

낙엽 / 유색 동본 - 김수호 (1940~ )

낙엽 / 유색 동본 - 김수호 (1940~ ) 다른 뿌리에서 태어나 다른 나무에서 살다 저마다 맡은 일을 다한 뒤엔 약속이나 한듯이 한 계절에 다 함께 지더니 센바람에 휩쓸리고 뭇발에 짓밟혀도 바삭바삭 할 일이 남은 것처럼 기 꺾이지 않으려고 울긋불긋 성깔도 부리다 끝내 흙으로 되돌아가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몸부림 어느 가지에서 왔건 모두 똑같은 흙색 유색 동본임을 확인하며 (171116)

말해 무엇 할까 - 김수호 (1940~ )

말해 무엇 할까 - 김수호 (1940~ ) 내 나라와 내 고향에 대하여 뻥튀기는 허풍쟁이나 진짜처럼 말하는 거짓말쟁이는 모두 내겐 안 좋은 사람이네 몸으로 겪은 날 속이는 거니까 또한 자기를 믿는 날 속인다면 더 안 좋은 사람이네 하물며 신앙을 앞세워 날 속인다면 말해 무엇 할까 하늘에 자비인들 어찌 구할 수 있을까 형제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영혼마저 짓밟고 회개하지도 않는, 할 수도 없는 원수를 피 흘린 형제보다 더 감싸며 (151205)

자매지간 - 김수호 (1940~ )

자매지간 - 김수호 (1940~ ) 젊은 부부가 어린 딸과 애완견을 데리고 공원 잔디밭에 넉넉히 자리잡고 앉는다 '아이구 예뻐라 우리 아가 아빠한테 가렴' 엄마의 말 떨어지기 바쁘게 뽀로로 달려가 아빠에게 먼저 안기는 강아지 예쁜 딸도, 졸지에 강아지와 자매가 되고 부부도 그들의 부모가 된다 아! 이 행복한 개판 (130109)

알몸의 악몽 - 김수호 (1940~ )

알몸의 악몽 - 김수호 (1940~ ) 찾아온 봄에 자리를 내준 추위 난 두터운 외투를 벗었네 그러나 스며든 예년에 없던 꽃샘추위 꼼짝없이 집안에 틀어박혔네 칠흑 속에 가두고 저들만의 별 잔치 밤새 옷 벗기는 끈적한 이불 그 역한 악취에 방을 뛰쳐나가야 했네 아, 이렇게 완전 알몸일 줄은, 정말 춥고 배고파 떨며 움츠릴 밖에 난 주유소로 뛰어들었네 냉소의 총알이 박혀 쓰린 가슴 휘발유를 한껏 붓고 라이터를 켰네 퍽! 화염 속에 희나리 된 몸 그 재 한줌을 벗어버린 영혼 맹하게 떠밀려 내 별에서 떠나야 했네 아, 이렇게 띵한 악몽일 줄은, 차마 (110504)

K-웨스턴 / 권총 이야기 - 김수호 (1940~ )

K-웨스턴 / 권총 이야기 - 김수호 (1940~ ) 태평양 전쟁과 6.25동란을 겪으며 자란 어린 시절 가장 즐기는 놀이는 당연히 전쟁놀이었소 아이들이 가장 소망하던 무기는 대장만이 허리에 차는 권총이구요 크기야 손바닥만 해도 누구든 한 방에 보내 버리니까요 처음 가까이서 권총을 본 게 해방 이듬해 국민학교 1학년 때였소 구시렁대는 소리에 눈을 뜨니 아빠가 육혈포를 손에 쥐고 있었소 깜짝 놀라 일어나 앉자 소문 나면 다 죽는다며 입단속을 시켰소 그럴만 하지 제 나름 이해했소 아빠가 항일 운동으로 옥고 치르고 늘 일경 감시하에 살았으니까요 해방 이후 세상이 어수선하다 느꼈기에 입술 깨물며 무사히 넘겼소마는 '우리 아빠는 권총도 있다' 애들한테 자랑을 못해 죽을 뻔 했소 혼란기에 극성스럽던 밤손님은 경비대..

치과에서 - 김수호 (1940~ )

치과에서 - 김수호 (1940~ ) 2017년 12월 20일자 위에 붉은 표지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인데 여성 대통령을 철창으로 처넣고 새 대통령을 만든 '촛불'이 달력만 미처 불사르지 못한 불찰이네 대통령을 뽑기로 했던 날에 그런 일은 없어졌으니 난 투표소가 아니라 치과에 들려 새 대통령 대신 앓던 사랑니를 뽑았네 이것도 있으나마나 한 적폐였나 (171220)

감나무를 보니 - 김수호 (1940~ )

감나무를 보니 - 김수호 (1940~ )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보니 한여름 옛집의 감나무가 생각난다 참새가 떼 지어 짹짹거리면 묻지 마 구렁이의 대목장 내방이라 기다렸다는 듯이 긴 장대로 후려 돌덩이로 짓이겼지 쥐 사냥 공로는 나 몰라라 땅꾼한테 넘길 것도 약에 쓸 것도 아니면서 징그럽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얼씬만 해도 소름이 돋지만 구렁이를 본 게 언제였는지 감나무를 보니 구렁이도 생각난다. (161120)

제주 앞바다의 하룻밤 - 김수호 (1940~ )

제주 앞바다의 하룻밤 - 김수호 (1940~ ) 해 지자 수평선 가로등으로 바뀐 집어등 환한 바닷속 고속도로 따라 밤새껏 폭주 어족들이 스피드를 즐기다 떼로 대형 사고에 휩쓸리고 그 생사 현장에 출동한 해경 구조대인 양 어선 무리가 밤샘 수습 임무를 완수한 듯 앞다투어 회항하며 만선 깃발에 피로를 푸는 새벽녘 뱃길 먼발치 종점 부두에 사고자 가족들인 양 어물상들이 판 벌이고 웅성거릴 즈음 하나둘 꺼지는 수평선 가로등 (17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