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2-4 김수호-문화새나시/유희경♣시 : 선

[유희경의 시:선] 사물의 생명 [문화/ 2022-10-12]

설지선 2022. 10. 12. 14:35

 



      생활감 - 조해주


      낡을수록 좋은
      형태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뒤축이 느슨해진 운동화처럼

      버려도 버려도 돌아오는 상자가 있다
      저주처럼

      왜 아름다울까 고작 낡은 오르골일 뿐인데
      묵직하고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가 더러 끊기고
      무디기 때문이다 즐거웠던 오후는
      이빨 빠진 엘피판이 되어 순간을 반복하고



      (조해주 시집 ‘가벼운 선물’)

사물의 생명


대학 시절 사진이 필요해졌다. 세상엔 그런 필요도 있다. 그래서 서랍을 발명했나 보다 인간은. 잘 넣어두었을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 두었나 하는 것이다. 분명 본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다행인지 가진 서랍이 몇 없다. 요령껏 뒤적이다 보면 금방 찾겠지. 그러나 웬걸.

책상 서랍부터 난관이다. 그곳에는 오래 간직해온 별의별 물건이 다 있어서 나를 끝도 없이 과거 어딘가로 데려가는 거였다. 이게 뭐지. 물음표를 찍었다가, 아, 하고 느낌표를 찍는 과거의 사물들. 덕분에 나는 수십 년을 우습게 왕복을 해본다. 누군가에겐 잡동사니일 것들이 내게는 예전 여행의 기억이고 친구, 직장 동료들과 벌인 즐거운 사건이며, 가족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다. 개중에는 한밤처럼 까맣게 잊고 있던 것도 있어서 그리움에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사물이란 무생물이 아니고 생물의 정의와는 다르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때를 그림자처럼 간직한 채 우두커니, 불러주길 기다리면서.

상념에 젖어 있다가 그만, 나는 원래의 목적 따윈 잊어버린 채 새벽을 맞이하고 말았다. 정작 찾아야 할 사진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았지만, 사진보다 생생한 기억들을 찾아내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또 당분간 잊고 살아갈 것이다. 추억이란 이따금 찾아봐야 아름다운 것 아니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희경 시인·서점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