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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 130

[유희경의 시:선] 질문들 - 장옥관 [문화/ 2023-01-11]

질문들 - 장옥관 있다가 없어진 자리 어떤 질문을 얹어놓을까요 그 탐스러운 수국꽃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온다던 사람 온 적 없다는 걸 당신의 의자에 앉아 오지 않는 오후를 하염없이 반드시 오지 않아야 한다는 무논에 저절로 주저앉는 어린 벼 포기 건드리고 가는 저 속삭임 (장옥관 시집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라’. 진부하리만치 평범한 한 문장이 올해 나의 다짐이다. 이를 실천하려면 이러저러한 용기가 따라야 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용기. 이를 고백할 용기. 조언을 수용해 바로잡는 데에도 필시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대충과 건성, 그로부터 비롯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질문하지 못하는 오만과 소심 탓이 분명한 터. 올해는 이를 바로잡으리라. 그러니 ‘질문하는 용기’가..

[유희경의 시:선] 끝과 시작 [문화/ 2022-12-28]

9쪽 - 성윤석 왜 끝이 없는가, 라고 물었을 땐 어디가 시작인가,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어떻게 앉아 있었느냐, 에 따라 하루의 슬픔이 변했다 어떤 날은 꽃을 들고 있었다 어떤 날은 칼을 들고 있었다 어떤 날은 시간을 들고 있었다 (성윤석 시집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끝과 시작 드디어 연말이다. 언젠가부터 이때만 기다렸다.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던, 정말이지 운이 없는 한 해를 떠나보내게 됐다. 어서 털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해야지. 아직 며칠 남았는데도, 책상 위에는 새 다이어리가 놓여 있다. 실은 벽에 걸어둔 달력도 내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잠들어 새해 아침에 깨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 어렵고 힘들었나 생각해보면 글쎄.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 크게 아..

[윤희경의 시:선] 눈 내린 다음 날 [문화/ 2022-12-21]

눈의 문 - 사가와 치카 그 집 주변에는 인간의 낡은 사유가 쌓여 있다 -마치 묘비처럼 핏기 없이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나는 문득 꽃이 핀 줄 알았다 그것은 나이 먹은 한 무리의 눈이었다 (사가와 치카 시집 ‘계절의 모노클’) 눈 내린 다음 날 주말 출근길. 버스 차창 너머가 온통 하얗다. 겨울이다 새삼. 두툼하게 챙겨 입도록 만드는 세찬 바람에도, 그래 놓고도 덜덜 떨게 되는 영하의 기온에도 실감하지 못한 계절감을 저, 소복하고 새하얀 눈 덕분에 느낀다. 누가 뭐래도 겨울의 왕은 눈이다. 저것이 없다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눈이 오면 일단 걱정이 먼저다. 길이 막히겠네. 서점 앞이 미끄러워지겠네. 귀찮고 번거롭고 위험해서,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한숨을 쉬게 되는 것..

[윤희경의 시:선] 우체국에 대하여 [문화/ 2022-12-14]

서열 - 박라연 아무리 넓고 넓은 우주라도 더 간절한 쪽부터 마음을 배달해주시려는 참 눈치 빠르신 우체부 아저씨, 만난 적 있습니다 (박라연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우체국에 대하여 집 가까이 편의점이 있을 때 그걸 일컬어 ‘편’세권이라 하더라. 기차나 지하철 역 부근 거주지를 의미하는 ‘역세권(驛勢圈)’을 변형해 만든 신조어리라. 그렇다면, 내가 운영하는 서점은 우세권이라 할 수 있겠다. 우체국이 가깝다는 의미이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옆의 옆집이다.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입장에서 우체국이 제공하는 편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더구나 책은 참 무거운 물건이다. 한 상자만 꾸려도 낑낑대며 옮길 수밖에 없는지라 소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어디 기능적 이유뿐이겠는가. 사람들이 모여야 ..

[유희경의 시:선] 헌 다이어리 [문화/ 2022-12-7]

까치밥 - 김상미 한밤중에 일어나 바다를 향해 달음질치던 절박한 발길을 끊고 날마다 세상이 요구하던 절대 교양을 끊고 쓸쓸하고도 쓸쓸한 장난감 네게 쓰던 분홍색 편지를 끊고 눈뜰 때마다 하루하루 증발하는 향긋한 생의 온기를 끊고 아득해지고 초라해지는 물거품 같은 나를 끊고 (김상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헌 다이어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말이다. 오가며 듣게 되는 캐럴과 이곳저곳에서 반짝이는 장신구들 덕분에 새삼스러워졌다. 얼마 전 뵈었던 한 선생님은 “세월 가는 속도를 이제는 포기했어.” 하셨다. 초탈해버린 듯한 그의 표정이 자주 떠오른다. 나도 저와 같은 표정을 짓게 되겠지, 싶기 때문이다. 서점 문을 닫은 늦은 시각. 노트를 하나 발견했다. 저것이 무얼까.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장 알..

[유희경의 시:선] 오래 보는 일 [문화/ 2022-11-30]

무너지는 것 - 이우성 어느 날 아빠는 술을 마시고 와서 형과 나를 깨워 앉히고 울었다 너희를 제대로 키운 게 맞지 엄마는 그만 자라고 하고 대학생인 형은 네 맞아요 아빠 맞아요 하품하며 말하고 나는 우리 반에서 팔씨름은 내가 제일 세요라고 말했다 아빠는 웃었다 잠들었다 무너지듯 (이우성 시집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오래 보는 일 내게는 만화가 친구가 있다. 친구가 만화가가 된 것이 아니라, 만화가였던 사람이 친구가 된 것이다. 내게 만화가 친구가 생기다니. 다양한 친구들이 있지만, 어쩐지, 만화가 친구는 각별하다. 만화책을 잔뜩 얻거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가 얼마 전 아빠가 되었다. 그는, 아내의 임신 소식도 출산 소식도 모두 만화로 전했다. 요즘은 육아 일기를 올리고 있다. 나는 SN..

[유희경의 시:선] 나선계단 [문화/ 2022-11-23]

계단이 오면 - 심언주 내려다보면 발 아래서 누군가의 머리가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발이 차곡차곡 쌓여 꿈틀거립니다 11월은 나 혼자 쌓은 것이 아니어서 단풍을 따라 뛰어내릴 수 없습니다. 계단 혼자서 계단을 오르내립니다. (심언주 시집 ‘처음인 양') 나선계단 내가 운영하는 서점은 나선계단 위에 있다. 서점에 닿거나 떠나려면 이 나선계단을 통과해야 한다. 이 방법뿐이어서 나는, 하루에 수십 번씩 오르내린다. 책 꾸러미들을 나르거나 화장실에 오갈 때, 누군가를 마중하거나 배웅해야 할 때 빙글빙글 돌며 삐걱삐걱 소리 내면서 오르내리는 나선계단. 이 나선계단을 사람들은 신기해한다. 흔치 않은 모양과 형식 때문일 것이다. 이 작은 서점의 상징물이 된 계단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에너지 넘치는 그들은 ..

[유희경의 시:선] 삶이라는 언덕 [문화/ 2022-11-16]

내 삶의 예쁜 종아리 - 황인숙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황인숙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삶이라는 언덕 인근 도서관에 납품하러 가는 길. 1㎞나 될까 싶게 가깝지만, 길목에는 제법 높은 언덕이 있다. 책을 가득 담은 수레를 세워두고 고민한다. 질러가면 힘이 들 것이며, 돌아가면 오래 걸릴 것이다. 실은 전번에도 전전번에도 같은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동일한 결론을 내렸었다. 지름길로 가자. 어찌 이리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인가. 중턱쯤 멈춰 서서 헉헉대면서, 전번과 전전번의 후회를 뒤늦게 기억해내는 것이다. 결국 돌..

[유희경의 시:선] 낙엽 쓸기 [문화/ 2022-11-09]

당신의 자세 - 신성희오늘도 노인은 빗자루로 낙엽을 쓸고 있다(…)나뭇잎 한 장 떨어지면 달려가서 줍고나뭇잎 두 장 떨어지면 달려가서 줍고동네 입구, 화이트 슈퍼 앞길을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그 짓을 되풀이하고(신성희 시집 ‘당신은 오늘도 커다랗게 입을 찢으며 웃고 있습니까’)낙엽 쓸기 내가 운영하고 있는 서점 앞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네 그루 있다. 그것들은 여름 내내 잎을 키우다가 가을이 되면 쏟아낸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거리가 뒤덮일 정도다. 인근 낙엽은 다 저 네 그루 잎일 거야. 나는 농담을 하곤 한다. 햇빛 잘 들고 바람 많은 곳에서 자라는 덕분일 것이다. 올봄에는 가지치기를 했는데도 어느새 우람해져 쉼 없이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겨울이 되어서도 다 떨구지 못하겠다..

[유희경의 시:선] 주고 받음 [문화/ 2022-11-02]

완전한 생 - 손택수 완전히 사랑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결혼행진곡 속에 있을 때도 나는 어딘가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불을 끄지 않고 기다리는 아파트 벼랑 위의 불빛이 나의 등대였으니 (손택수 시집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주고받음 한 도서관으로부터 10주간 도서관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시 창작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잠시 고민했다. 기간이 너무 길고, 나는 너무 바쁘다. 핑계다. 자신이 없다. 시에 대해, 창작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강의를 맡을 때마다 나는 동일한 막막함에 시달린다. 거절하지 못했다. 시의 좋음을 알릴 수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시를 좋아하고 즐기게 된다면. 시인이라면 가질 법한 책임감에 승낙하고 말았다. 왕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