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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 130

[유희경의 시:선] 감정의 평균 - 이정록 (문화/ 2022-0525

[유희경의 시:선] 감정의 평균 - 이정록 (문화/ 2022-0525] 감정의 평균 - 이정록 부푸는 무지개를 슬그머니 끌어내리고 뚝 떨어지는 마음의 빙점에는 손난로를 선물할 것 감정의 평균에 중심 추를 매달 것 꽃잎처럼 달아오른 가슴 밑바닥에서 그 어떤 소리도 올라오지 않도록 천천히 숨 쉴 것 불에 달궈진 쇠가 아니라 햇살에 따스해진 툇마루의 온기로 손끝만 내밀 것 - 이정록 ‘감정의 평균’(시집 ‘그럴 때가 있다’) 마주 앉은 선배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으로, 여러 점에서 탁월하지만 그중 가장 감탄할 만한 면모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심지(心志)에 있다. 그와 여러 해 알고 지내며 함께 일을 해본 적도 있는데 한 번도 그가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렇긴커녕 매사 신중하게 판단하고 ..

[유희경의 시:선] 정 - 송재학 [문화/ 2020-05-18]

[유희경의 시:선] 정 - 송재학 [문화/ 2020-05-18] 정 - 손재학 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게 정(情)의 비결이다 언틀먼틀 요철이 들락거리면서 비로소 형체라는 물컹한 감정을 일군 것이 육(肉)이요 땅에 바로 세운 채 직립한 것을 뼈(骨)라 일컫는다 그것들은 해체가 어려운 가역반응이다 - 송재학 ‘정’(시집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가게란 붙박이가 아닐 수 없다. 트럭이나 리어카에 담겨 이동하기도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아 펼쳐놓아야 ‘가게’가 되는 것이며 자리를 잡으면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자리에 주고받을 것을 부려놓는다 하여 가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드나드는 이들, 즉 ‘손’이 있어야 가게가 된다. 손이 없으면 가게는 사라진다. 빈자리, 공실이 된다. ‘임대..

[유희경의 시:선] 삶이라는 도서관 - 송경동 [문화/ 2022-05-11]

유희경의 시:선] 삶이라는 도서관 - 송경동 [문화/ 2022-05-11]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 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송경동 ‘삶이라는 도서관'(시집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서점 구석구석을 살피는 사람이 있다. 스무 살쯤 됐을까. 보통은 지나치고 마는 구석구석까지 구경하고 있으니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그는 주저하다가 내가 있는 카운터로 와 묻는다. “책을 읽어봐도 되나요?”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문답을 주고받은 다음에야 알아챈..

[유희경의 시:선] 귀엽고 아름다운 오해 [문화/ 2022-05-04]

[유희경의 시:선] 귀엽고 아름다운 오해 [문화/ 2022-05-04] 나는 볼 수 없는 것 당신은 보고 있을 거예요 그쪽에서 꽃이 피고 있다고 하셨죠 못 본 꽃을 본 당신이 보여주세요 모르는 암흑이라서 당신 손을 잡아요 당신을 통해서 끝이라고 쓰고 꽃이라 읽을 수 있어요 - 황혜경 ‘See’(시집 ‘겨를의 미들’) 선배가 아내의 전화를 받은 것은 퇴근하려 채비를 하던 참이랬다. “오늘 늦지 않지? 올 때 꽃 좀 사다 줄래?” 꽃이라고? 의아해진 선배는 재차 물어보았다. 선배의 아내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응.” 이상했지만, 더 물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혹시 기념일을 놓친 건가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알았다고 대답을 하면서 서둘러 달력을 뒤져본 선배는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부쩍 떨어진 기억력을..

[유희경의 시:선] 진짜 밤 [문화/ 2022-04-27]

[유희경의 시:선] 진짜 밤 [문화/ 2022-04-27] 그 옆 403동에도 또 옆의 405동에도 꼭대기에 어둠이 서 있다. 어둠 그리고 어둠이 서 있다. 꼭대기에서 어둠이 꼼짝 않고 있다. 왜 그렇게 멈춰 있는지 모른다. 고장 난 어둠 고장 난 채 서 있는 어둠 고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둠 어디선가 미친 듯이 웃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 이수명 ‘4단지’(시집 ‘도시가스’) 퍽 오래전 일이다. 문학 행사 참여차 목포에 갔다. 행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참여자들의 기분 좋음은 뒤풀이로 이어졌다. 옆자리 선배가 술도 깰 겸 산책이나 다녀오자, 속삭인 건 흥이 한창 오를 때쯤이었다. 우리는 함께 뒤풀이 장소 주변 골목을 쏘다녔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어두운 골목은 어두운 골목으로 이어지고, 어디서 개가 ..

[유희경의 시:선] 기쁨과 슬픔 [문화/ 2022-04-20]

[유희경의 시:선] 기쁨과 슬픔 [문화/ 2022-04-20] 그렇군요 많이 놀라고 속상하셨겠어요 저는 당신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슬픔을 꼭 안아주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어요. 하지만 때로는 슬픔이 우리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니까요. 우리, 우리의 슬픔을 믿기로 해요. - 김누누 ‘건너편의 슬픔’(시집 ‘일요일은 쉽니다’) 얼굴 까먹겠다고 연락한 후배를 만났다. 반갑게 인사와 근황을 나누고 난 다음 그는 조심스레 묻는다. 요즘 SNS에 올라오는 글마다 슬픔이 짙다고. 괜찮은 거냐고. 그랬나. 나는 되짚어 생각해보다가, 아니라고 별일 없다고. 봄이라도 타는 모양이라고, 하하 웃었다. 그러면서, 사실 뭐 기쁠 일도 없다고 덧붙였지만 후배는, 슬프지 않다는 것에 안도한 모양이..

[유희경의 시;선] 어머니의 제주 [문화/ 2022-04-06]

[유희경의 시;선] 어머니의 제주 [문화/ 2022-04-06] 어머니의 제주 사과 한 쪽을 베어 먹다 뱉은 사과 씨 하나를 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내 장난에 너는 환호하며 주먹을 꼭 쥐고 외쳤다. “심었다" 네가 들어 올린 그날의 작은 땅. 사과나무의 가장 어린 뿌리는 땅속 제일 깊은 곳에 있기 마련이다. 잔뿌리 같은 너의 손금들이 땅속처럼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작고 캄캄한 주먹 속에서 움트고 - 김중일 ‘내일 지구에 비가 오고 멸망하여도 한 그루의-딸과 함께’ (시집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올 설부터 매일매일, 어머니께 1만 원씩을 보내고 있다. 어머니는 픽- 하고 웃으셨는데, ‘며칠이나 지키나 보자’ 하고 생각하셨나 보다. 다음 날부터 약속이 실행되었다. 세 달쯤 ..

[유희경의 시:선] 희망은 고독사하지 않는다 - 오은 [문화/ 2020-03-30]

[유희경의 시:선] 희망은 고독사하지 않는다 - 오은 [문화/ 2020-03-30] 희망은 고독사하지 않는다 - 오은 혼자 있을 때 꿈이었던 것이 함께 있을 때 희망이 되었다 꿈은 만남을 꿈꾸고 희망은 고독사하지 않는다 희망찬 꿈과 꿈같은 희망 - 오은 ‘107번째 연작 시’ (시집 ‘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48개국 108명의 시인이 쓴 팬데믹 시대의 연시’)

[유희경의 시:선] 봄에 시인은 위험해진다 - 최문자 [문화/ 2022-03-23]

[유희경의 시:선] 봄에 시인은 위험해진다 - 최문자 [문화/ 2022-03-23] 봄에 시인은 위험해진다 - 최문자 봄에 시인은 위험해진다 감정이 생기고 제목도 모르면서 새로운 거짓말이 되고 싶다(…) 꽃이 돌멩이처럼 잊었던 기억을 찍어내고 무더기 무더기 떼로 몰려온다는 것 꽃은 구름이 가득한 동쪽으로 가는 길이랬어 잘 아는 꽃이었어 알다가도 실금 같은 것 - 최문자 ‘Nothing-봄에는’(시집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세상 모든 사람은 시인이다. ‘시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세상 모든 사람이 시를 쓴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좀 더 과장하면 매 순간. 시라는 게 꼭 활자화돼야, 육성의 몸을 입어야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시인이라서,..

[유희경의 시:선] 글쓰기의 어려움 - 임수현 [문화/ 2022-03-16]

[유희경의 시:선] 글쓰기의 어려움 - 임수현 [문화/ 2022-03-16] 글쓰기의 어려움 어제도 오늘도 한 줄도 쓰지 못한 잎사귀는 아무렇게 낡아 가요 초심이란 조바심과 같아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부를 때 쓰는 말일까요 (…) 슬픔은 잘 적으면 잎맥처럼 반짝인다 문장을 보고 오늘은 어디든 가 보겠다 했지만 - 임수현 ‘어디로 갈지 몰라 달팽이에게 길을 물었어요' (시집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직업을 밝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도리 없이 긴장하곤 한다. 시인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나, 남다른 것도 사실이다. 내 대답을 들으면 그렇군요! 하고 감탄한 다음, 무언가 떨어뜨린 사람처럼 다음 말을 찾느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시에 관한 경험이나 생각을 풀어놓는 사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