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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 130

[유희경의 시:선] 사랑의 결 - 조온윤 [문화/ 2022-03-02]

[유희경의 시:선] 사랑의 결 - 조온윤 [문화/ 2022-03-02] 사랑의 결 - 조온윤 오랫동안 우리는 길고 긴 복도 같은 일인칭을 걷고 있었다 눈이 어두운 우리는 불빛만을 향해 걸어서 누군가 옆에 함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눈이 어두워서 밤과 낮을 구별할 줄 모르는 심해어처럼 우리는 꿈과 꿈 아닌 것을 구분할 줄 몰랐다 - 조온윤 ‘유리행성’ (시집 ‘햇볕 쬐기’) 사람 구경은 언제나 즐겁다. 어쩜 이렇게 제각각일까. 같은 삶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틈만 나면 넋을 놓고 오가거나 머물러 있는 이들을 훔쳐보곤 한다. 각기 다른 만큼, 닮아가는 것도 많다. 유행하는 양식이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아이템들이 있다. 이를테면 스마트폰. 하나같이 네모난 기계를 들여다보거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

[유희경의 시:선] 아름다움을 결심한다는 것 - 박규현 [문화/ 2022-02-23]

[유희경의 시:선] 아름다움을 결심한다는 것 - 박규현 [문화/ 2022-02-23] 아름다움을 결심한다는 것 - 박규현 오늘 반드시 아름다운 것을 봐버리자 너는 갓길의 트럭에서 자두 한 바구니를 샀다 조수석에 앉아 비닐봉지의 입구를 열어 자두가 바람을 쐴 수 있도록 도왔다 보이는 건 논두렁뿐 돌아서 가면 어디든 멀었다 - 박규현, ‘먼 곳’(시집 ‘모든 나는 사랑받는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이러저러한 여행을 경험해본 후에 얻은 결론이다. 대개는 여행에 대한 나의 생각을 ‘특이하다’ 여긴다. 시간과 돈이 없어 자주 즐기지 못하는 것뿐, 여행은 응당 좋은 것, 아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때문에 나는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여행의 좋음’을..

[유희경의 시:선] 사이 - 권누리 [문화/ 2022-02-16]

[유희경의 시:선] 사이 - 권누리 [문화/ 2022-02-16] 사이 - 권누리 우리는 시외의 천문대로 향했다 천문대에는 사람이 많았고 비치된 좌석에 사람들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대해 별과 별 사이의 거리에 대해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완전히 놓친 것에 대해 말했지만, 우리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 권누리, ‘프린트’(시집 ‘한여름 손잡기’) 요즘 햄버거 가게나 커피숍에는 주문과 결제를 할 수 있는 ‘키오스크’라는 전자단말기가 설치돼 있다. 키오스크(kiosk)란 본래 이집트 등 지중해 인근 국가들에 있던, 휴게 정자(亭子) 역할의 고대 건축물 명칭인데, 시간이 흘러 음료 스낵을 파는 가판 상점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정자와 가판대의 유사성은 이해할 만하나, 그저 계산만 해주는 무뚝뚝한 ..

[유희경의 시:선] 선물 - 박상수 [문화/ 2022-02-09]

[유희경의 시:선] 선물 - 박상수 [문화/ 2022-02-09] 선물 - 박상수 걸어도 걸어도 무엇도 보이지 않는 나날이 계속된다면, 갖고 싶어 햇살이 오래 들어오는 2층 창가, 담쟁이덩굴이 흔들리고 윤기 어린 나무 탁자 위로는 바스켓 화분이랑 핸드메이드 유리 동물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는 곳. 어른대는 빛 속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아이들이 있구나 - 박상수, ‘작은 선물’(시집 ‘너를 혼잣말로 두지 않을게') 생일을 맞이한 친구에게 뭘 갖고 싶으냐고 물어봤다. 집, 당첨된 복권, 외제차. 해줄 수 없는 목록을 대겠지. 그러곤, 축하로 충분하다고 어물쩍 넘어가려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정색을 하면서, 내 마음대로 고를 거라고 으름장을 놓게 되는 것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선물을 두고 우리는 같은 패턴..

[유희경의 시:선] 눈이 내린다 - 임선기 [문화/ 2022-01-26]

[유희경의 시:선] 눈이 내린다 - 임선기 [문화/ 2022-01-26] 눈이 내린다 - 임선기 밤이 조용히 말한다 아이들아 여기 눈을 두고 갔구나 눈은 녹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꿈나라에서 잠이 한창이다 순수한 꿈을 꾸는 아이도 있다 두고 온 눈사람이 걱정인 아이이다. 밤이 고요히 말한다 아이들아 여기 눈으로 돌아오렴 날이 밝거든 - 임선기, ‘밤의 독백’(시집 ‘피아노로 가는 눈밭’) 눈 온다는 소식에 눈살부터 찌푸리고 만다. 서점 앞 눈을 치워야 한다. 벌써 피곤해지지만, 치우지 않으면 누가 미끄러져 다칠 수도 있고, 서점 내부도 엉망이 될 것이다. 눈 밟은 사람들의 검고 커다란 발자국이 아른거린다. 염화칼슘을 뿌리고 싶지 않다. 간단하고 편한 것 중 해롭지 않은 것은 별로 없다. 모르긴 몰..

[유희경의 시:선] 그땐 좋았지 - 심재휘 [문화/ 2022-01-19]

[유희경의 시:선] 그땐 좋았지 - 심재휘 [문화/ 2022-01-19] 그땐 좋았지 - 심재희 끈이 서로 묶인 운동화 한 켤레가 전깃줄에 높이 걸려 있다 오래 바람에 흔들린 듯하다 어느 저녁에 울면서 맨발로 집으로 돌아간 키 작은 아이가 있었으리라 허공의 신발이야 어린 날의 추억이라고 치자 구두를 신어도 맨발 같던 저녁은 울음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구부정한 저녁은 당신에게 왜 추억이 되지 않나 - 심재휘, ‘신발 모양 어둠’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오랜만’이란 명사의 참 의미는 좀 살아보아야 알 수 있는 것 같다. 새삼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오랜만’에 만나게 된 옛 친구 덕분이었다. 서점 카운터 너머로 불쑥 내민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나는 낯설면서도 익숙함을 ..

[윤희경의 시:선] 길 - 윤희상 [문화/ 2022-01-12

[윤희경의 시:선] 길 - 윤희상 [문화/ 2022-01-12] 길 - 윤희상 길은 끝이 없다 그러니까, 길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막다른 길에서 보았던, 길은 여기서 끝났습니다라는 친절한 말은 틀린 말이다 길이 끝났다는 곳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전혀 다른 오는 길이다 - 윤희상 ‘길’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2021년 12월 31일과 2022년 1월 1일 사이엔 고작 1초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오후 11시 59분 59초에서 자정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만 같다. 새 운(運)을 들이게 된 기회를 얻은 것 같고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담배와 술을 끊거나 운동을 시작하거나. 하여간 새해이기 때문에 시작되는 많은 일이 있다. 한편, 마흔 해 넘게 새해를 맞이하다 보니, 좀 시들..

[유희경의 시;선] 아이 - 허연 [문화/ 2022-01-05]

[유희경의 시;선] 아이 - 허연 [문화/ 2022-01-05] 아이 - 허연 아이는 파도를 믿고 파도는 아이를 살려둔다 둘은 그렇게 몇 시간을 논다 아이는 조개껍데기를 손에 쥐고 잠이 든다 나는 그것을 본다 세상의 모든 여름이었고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나의 전부가 나를 버려도 좋았다 아이는 나를 살려둔다 - 허연 ‘파도는 아이를 살려둔다-스텔라’ (시선집 ‘천국은 있다 친구 부부가 아이와 함께 서점에 놀러 왔다. 아이는 부쩍 컸다. 알아보고 활짝 웃는다. 희경이 삼촌, 하고 부를 줄도 안다. 눈높이를 맞춘 나에게 팔을 벌려주는구나. 아이를 당겨 품에 안는다. 다칠까 봐 슬쩍 힘을 풀고서.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보고 싶었음은 이런 것이겠다. 나는 그 작은 힘으로부터 ..

[유희경의 시:선] 대추 한 알 - 장석주 {문화/ 2021-12-29]

[유희경의 시:선] 대추 한 알 - 장석주 {문화/ 2021-12-29]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장석주 ‘대추 한 알’(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한여름쯤 국가지원사업을 따냈다. 선정될 때는 기쁘고 준비할 때는 설레고 실행할 때는 즐거웠으며 정산을 하게 되자 더없이 괴로워졌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틀림없이 집행을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수치가 맞지 않았다. 되짚어보면 허술한 것투성이였다. 한 보름쯤 마음 앓이를 했나 보다. 어느덧 지원을 할 때의 패기와 포부는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유희경의 시:선] 귤 상자 - 안희연 [문화/ 2021-12-22]

[유희경의 시:선] 귤 상자 - 안희연 [문화/ 2021-12-22] 귤 상자 - 안희연 귤 상자를 들고 너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었어. 겨울 금화는 귤. 겨울 금화는 귤. 노래진 손을 보며 낄낄거릴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이상하지, 골목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좀처럼 길을 내어주지 않고. 너의 집을 찾을 수가 없어. 너의 집을 찾아갈 수가 없구나. - 안희연 ‘단차’(시집 ‘사랑에 대답하는 시’) 서점, 하면 책을 떠올리는 게 보통의 경우겠다. 하물며 서점지기라면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먹을 것’을 생각한다.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좋은 친구가 많은 덕분이다. 그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늘 양손 가득 무언가 챙겨오고 그것은 대부분 먹을 것들이다.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