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 눈이 내린다 - 임선기 [문화/ 2022-01-26]
눈이 내린다 - 임선기
밤이 조용히 말한다
아이들아 여기 눈을 두고 갔구나
눈은 녹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은 꿈나라에서 잠이 한창이다
순수한 꿈을 꾸는 아이도 있다
두고 온 눈사람이 걱정인 아이이다.
밤이 고요히 말한다
아이들아 여기 눈으로 돌아오렴 날이 밝거든
- 임선기, ‘밤의 독백’(시집 ‘피아노로 가는 눈밭’)
눈 온다는 소식에 눈살부터 찌푸리고 만다. 서점 앞 눈을 치워야 한다. 벌써 피곤해지지만, 치우지 않으면 누가 미끄러져 다칠 수도 있고, 서점 내부도 엉망이 될 것이다. 눈 밟은 사람들의 검고 커다란 발자국이 아른거린다. 염화칼슘을 뿌리고 싶지 않다. 간단하고 편한 것 중 해롭지 않은 것은 별로 없다. 모르긴 몰라도 거리 가득한 소금기가 생태계에 도움 될 리 만무하다. 그러니 뾰족한 수가 없다. 가시지 않는 아침잠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는 수밖에.
막상 문을 열어보곤 절로 감탄했다. 온통 흰빛이다. 미끌미끌 아슬아슬한 것이 마냥 재미있다. 동네 아이들은 늦잠을 자는 모양이다. 제법 쌓인 눈이 고스란하다. 출근은 미뤄두고, 눈 치우기도 잊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싶다. 괜히 참견하며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싶어진다. 눈놀이는 내 편 네 편 따로 없으니까. 끼어들면 한패가 될 수 있으니까. 참아야지. 나는 어른이고 어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 눈이 아름다운 까닭은 세상천지 구별 않고 덮어주기 때문이 아닌가. 어떤 시인이 적은 것처럼, 눈은 대기업 회장님 집 앞에도 노동자의 집 지붕 위에도 내린다. 어린이에게도 눈이고 어른에게도 눈이다. 눈 앞에선 누구나 아이가 된다. 누구나 눈사람을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을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나는 장갑을 고쳐 껴본다. 지구에서 가장 멋진 눈사람을 세워놓을 작정을 되새기면서.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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