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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 130

[유희경의 시:선] 나란히 앉아주는 사람들에게 [문화/ 2023-08-16]

증명 - 김뉘연 빛을 나누어 쓰기로 하고, 나란히 앉는다. 흩어지는 시간을 각자 함께 바라보는 시간까지. 빛을 만져 누구의 시간을 밝혀내기로 한다. 그것이 빛이 아니라 해도. (김뉘연 시집 ‘문서 없는 제목’) 나란히 앉아주는 사람들에게 ‘시공간’이란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모든 것이 바짝 붙어 있는 시대에, 전송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문자는 물론이요, 사진이나 동영상도 전달할 수 있는 요즘 같은 때에, 관제엽서 같은 것을 판매할까 싶었다. 역시나 우체국에서도 뜻밖의 주문이었던 모양이다. 한참 찾아 엽서를 꺼내주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여러 형식이 있듯, 전달하는 방식과 수단 역시 따로 있는 법이다. 문자메시지로 가볍게 전해야 할 소식과, 이메일로 상세히 전해야 할 소식이 따로 있지 않은가. 그러니 엽서..

[유희경의 시:선] 나의 날들 [문화/ 2023-08-09]

오늘의 달력 - 유현아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유현아 시집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나의 날들 서너 해 전부터 일력이 유행이다. 예전 할머니·할아버지 댁에 걸려 있던 것처럼 커다랗지 않다. 오히려 손바닥만 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기 딱 좋은 크기다. 얼핏 보기에 귀엽고 재미난 듯하나, 이것 또한 낭비가 아닌가 싶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기가 사그라들긴커녕 일종의 관례가 된 모양인지 올해는 여러 출판사가 일력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때마침 누가 선물을 해준 것도 있고 해서 올..

[유희경의 시:선] 여름 낙엽 [문화/ 2023-08-02]

감정의 경제 - 천서봉 저 하늘, 살 수 있나요? 구름은 어제보다 상승해 있고 오늘도 우리의 감정은 고독의 하한 근처를 서성거렸는데요 바닥났던 잔고의 겨울나무들이 꽤 살 만해진 여름입니다 가을까지 좀 기다려주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나의 기색은 근처 단풍나무에 넣어두겠습니다 (천서봉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여름 낙엽 장마 끝 무렵.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서점 앞에 낙엽들이 잔뜩 내려앉아 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나는 느닷없는 풍경에 멈춰 서고 말았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인데 낙엽이라니. 몇몇 잎이 나뒹구는 정도라면 성미가 마른 녀석들이네, 혀를 차고 잊을 일이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바짝 마른 작은 잎이다. 한가득 초록 잎을 이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

[유희경의 시:선] 인간성에 대하여 [문화/ 2023-07-26]

다 먹은 옥수수와 말랑말랑한 마음 같은 것 - 주민현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매번 명쾌하게 물어보는 AI에게 너와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릎을 꿇고 심장도 내어놓고 이윽고 우정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기까지 그런 것이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주민현 시집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인간성에 대하여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일에 함께하고 있다. 대화를 나누고 결론을 도출하는 일은 언제나 지난하다. 지쳐갈 때쯤, 참석자 중 하나가 새로운 SNS 서비스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을 해왔다. 아직, 이라는 나의 대답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말을 잇지 않았고 나 역시 대꾸하지 않았으므로 대화는 거기까지였지만, 그의 반응이 의미하는 바는 짐작 간다. 시인도 시대에 발맞춰..

[유희경의 시:선] 손의 일 [문화/ 2023-07-19]

잡아주는 마음 - 김영미 문을 잡고 모르는 사람을 기다려주는 아는 마음과 같은 소리를 내며 물을 내리고 다른 수도꼭지를 들어 올린다 거품 속에서 손가락 사이사이가 친해진다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된다 빠져나가지 않는 힘을 확인한다 이것은 나와 나의 작용 (김영미 시집 ‘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 손의 일 우산의 손잡이를 꼭 쥐고 젖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인데, 앞서가는 두 사람이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있다. 손잡이를 나란히 쥔 두 사람 손에 눈길이 간다. 서로의 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상대를 위해서라면 내 어깨 젖는 것쯤은 상관없다는 다정. 그들과 나, 셋만 아는 비밀이 좋아서 싱긋 웃고 만다. 식당 앞에선 문을 붙들어주는 손이 있다. 비에 젖지 말고 들어오라는 배려다. 작은 선의고 커다란 기쁨이다...

[유희경의 시:선] 우연의 힘 [문화/ 2023-07-12]

돌아오는 우연 - 강혜빈 우연의 눈을 보면 흔들리는 촛불처럼 영원히 순해질 수 있다 우연은 찻잔을 비우고 풀썩 일어선다 나는 따라 일어선다 주변을 둘러보니 서 있다 우리만 너무 언젠가 같은 장면에서 헤어진 적 있던가 그때 레몬차를 쏟았던가 그러나 우연은 돌아왔다 (강혜빈 시집 ‘미래는 허밍을 한다’) 우연의 힘 시집서점을 운영한 지 7년이 되었다. 매년 서점 생일이 되면 이벤트를 마련했다. 낭독회를 하거나 굿즈를 만들거나. 하여간 시집서점이란 이유만으로 응원과 격려를 주저하지 않는 마음들을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올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SNS에 7주년을 알리는 메시지와 간략한 감사 인사를 표하는 정도로 갈음했던 까닭은, 그간 나의 노력은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매..

[유희경의 시:선] 여름 이야기 [문화/ 2023-07-05]

한 해의 절정이다. 무엇이 되었든 절정을 미워하지 않는다. 기승을 부리는 절정의 순진을 얌전하게 따라간다. 비록 더위가 힘들지만 더위가 수그러드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여름이 한 해의 끝이다. 여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멈추고 정지하게 된다. 더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 이수명 산문집 ‘내가 없는 쓰기’에서 여름 이야기 안부 인사를 대신해 우리는, 계절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계절을 좋아하세요?” 간단히 노닥이기 좋은 소재이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해보는 데에도 제법 쓸모가 있는 이 질문을 나 역시 받곤 한다. 고민할 것 없다. 어차피 봄, 여름, 가을, 겨울 넷 중 하나 아닌가. “아, 저는 간절기가 좋은데요”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매사 너무 진지한 건 아닌지 생각해볼지어다. 그렇게 ..

[유희경의 시:선] 시는 질문이다 [문화/ 2023-06-28]

언덕을 넘는 사람들 - 정영효 확실함을 믿지 않는 곳에서는 가장 현명한 해결책을 질문이라고 부른다 어딘가에 숨어서 이유를 구성하고 있다는 지금은 질문이 필요해 너는 질문을 만나는 게 좋겠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생활을 잃은 이들이 질문을 찾아 언덕을 넘는다 (정영효 시집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 시는 질문이다 내가 운영하는 서점에는 ‘궁리책상’이라는 자리가 있다. 혼자 쓰기에 다소 널찍하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게 없다. 그럼에도 근사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아무래도 시집 가득한 책장에 둘러싸인 시집 서점의 책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한껏 궁리를 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번듯한 한편에 자리하게 두었다. 이 책상 위에는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자루가 놓여 있다. 어떠한 강제도..

[유희경의 시:선] 기다리는 희망 [문화/ 2023-06-21]

앙망 - 백은선 희망과 함께 오후의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신다 어젯밤에 나 꿈을 꿨어 차가운 계단에 앉아 내내 기다리는 꿈 희망은 말한다 나는 머그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본다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인다 (백은선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기다리는 희망 서점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참이다. 옆 가게 커피숍 사장님과 마주쳤다. 목례하고 지나치려는데, 나를 부른다. “요즘 서점은 좀 어때요.”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인사치레인지 진지한 질문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는데, 그것은 진심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리숙할 정도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불현듯 시작된 어려움이 느닷없이 끝날 리 없다는 것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던 ..

[유희경의 시:선] 느닷없이 외로울 때 [문화/ 2023-06-14]

바지를 입은 사람은 바지를 입고 떠난다 - 황인찬 산책 나온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인사를 해야 하나 산책 중이시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해야 하나 알긴 아는데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세계의 밤이 오고 늘어선 집들에 불이 켜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황인찬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느닷없이 외로울 때 불쑥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은 대개 한밤중 찾아온다. 부지불식간에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통화 목록과 주소록을 넘겨본다. 이러저러한 이름들이 손끝에 맺혔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늦은 시간, 이런 마음에 누가 도움이 되려나. 그러다 멈추게 되는 것은 주로 뜻밖의 누군가. 나의 안부 인사에 친구는 놀란 모양이다. 무슨 일이냐고 반복해 캐묻는다. 나는 그가 마치 내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