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2-4 김수호-문화새나시 130

[유희경의 시:선] 다른 숨 [문화/ 2023-10-25]

소설처럼 - 한여진 사람들은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역에서 출발해 이미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기차가 출발하면 창문에 비친 얼굴들은 자기만의 생각과 잠에 빠져 희미해지고 기차는 계속해서 멀어지다 이제 하나의 점이 되어버렸는데 이게 다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여진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다른 숨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조용하고 느린 말씨를 가진 남자였다. 충남 논산에 있는 한 기관에서 일한다는 그는 바쁘고 번거롭겠지만, 그곳 지역에 특강을 와주십사 부탁했다. 거절하지 못했다. 한 시절 우리 서점을 방문하던 단골이라 자신을 소개해서라거나, 지역엔 문화생활에 목마른 사람이 많다는 설득 때문만은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홀렸다고 해야겠다. 소개하고..

[유희경의 시:선] 보이지 않을 뿐인 [문화/ 2023-10-18]

한밤의 공 줍기 - 조온윤 밤마다 떨어진 공을 줍는 사람이 있네 온종일 공을 날려보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미화원의 파업에 미화되지 않는 거리 세상에는 스위치를 내렸다 올리듯 요란함이 간단히 정리되는 마법은 없지 (조온윤 시집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보이지 않을 뿐인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시간도 아낄 겸 질러가 볼까. 매일 걷는 길의 반복이 지겨워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디뎌 보지 못한 길은 낯설고, 사는 모양은 비슷비슷 낯익다. 집집마다 내놓은 화분과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 사이를 걷다가 경계석 위에 버려진 일회용 플라스틱 컵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처럼 인적 드문 골목에도. 한숨이 나오지만 실은 어디에나 버려져 있지. 우리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지난 연휴의 풍경..

[유희경의 시:선] 시 쓰기 좋은 계절 [문화/ 2023-10-11]

이 볼펜으로 - 이성부 이 볼펜으로 사랑을 적기 위해 한 점 붉디붉은 시의 응결을 찍기 위하여 오늘 밤 나는 다른 마음이 되고 싶다. 좀 멀리 다른 데를 보고 싶다. (이성부 시집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시 쓰기 좋은 계절 시 읽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시 쓰기를 권하곤 한다. 그런 제안을 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한 평론가로부터 “시인들은 사람들이 시 쓰기를 참 바라는 모양”이라며, 자신은 “한 열 번쯤 권유를 받은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시인 입장에서 시인이 많아진다고 딱히 좋을 것도 없거니와, 그건 제안을 받는 쪽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제안을 받은 사람은, “실은 그래 볼까 생각 중이다”며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를..

[유희경의 시:선] 이 가을의 무늬 [문화/ 2023-10-04]

이 가을의 무늬 - 허수경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허수경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 가을의 무늬 빗소리 듣는다. 가만 곰곰해지는데 나는, 무슨 생각이 이리 깊은 것이냐. 덥다와 춥다 사이. 휘둘리지 않고 온몸의 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이구나 가을은. 창문을 좀 더 열어둔다. 셀 수도 따질 수도 없는 많은 것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다. 지금 나는 가을을 ‘타는’ 모양이다. 사전을 열어 ‘타다’를 검색해본다. 아홉 갈래의 의미가 있구나. 하나하나 대입해본다. 불꽃이 일어 ‘타는’ 것도 말이 된다. 마른 마..

[유희경의 시:선] 내 이름 [문화/ 2023-09-27]

사람이 되어 가는 건 왜 이렇게 조용할까 - 김현 내 이름 현은 빛날 현으로 주로 쓰이지만 나는 밝을 현을 좋아한다 빛난다고 해서 밝지 않고 밝다고 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사람이 되어 간다는 건 이름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되어 가는 건 왜 이렇게 조용할까 (김현 시집 ‘장송행진곡’) 내 이름 내 이름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한다. 방금 전 걸려온 전화도 그러했다. 제가 유희경입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건너편에선 깜짝 놀라며 남자분인 줄 몰랐다고 사과를 하는 거였다. “괜찮습니다. 자주 있는 일이에요.” 상대를 안심시켰다. 내 이름을 처음 접하는 어른들은 뜻밖이라는 듯 웃으며 “이름이 참 예쁘구나.” 얼버무렸다. ‘나는 예쁘지 않다는 건가.’ 오랫동안 내 이름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

[유희경의 시:선] 해주지 못한 말 [문화/ 2023-09-20]

며칠 후 - 김소연 조금만 더 그렇게 하면 예순이 되겠지. 이런 건 늘 며칠 후처럼 느껴진다. 유자가 숙성되길 기다리는 정도의 시간. 그토록이나 스무 살을 기다리던 심정이 며칠 전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편으로 기다리던 며칠 후는 감쪽같이 지나가 버렸다.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 해주지 못한 말 다 늦은 시간, 서점에 찾아온 어린 학생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애써 못 본 척하였다. 이럴 때 호들갑을 떨며 위로를 건네거나, 그럴 일이 아니다. 다그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줄 때이다. 막막하다고 한다. 대학 졸업이 목전인데 자신의 삶은 물음표투성이라서. 두렵다고 한다. 섣부른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될까 봐서. 잘 안다고 한다. ..

[유희경의 시:선] 오래 고르는 마음 [문화/ 2023-09-13]

기억의 책 - 김도 저는 읽던 것을 다시 읽어요 돌아서서 걷는다고 왔던 길을 다시 걸어보겠다고 말해야지 한때는 나를 만들어낸 목소리로 알았으나 나를 걷게 하는 목소리였던 목소리를 왜 그렇게 밤이면 펴들고 읽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면 아마도 (김도 시집 ‘핵꿈’) 오래 고르는 마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니야. 소풍의 계절이지. 손님 없는 서점에서 내내 푸념 중이다. 오늘도 매대에 놓인 알록달록한 책들은 참으로 한가롭다. 어서 읽어줄 사람을 찾아가라, 재촉해보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삐뚜름하게 놓인 책들을 바로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서점에서 ‘매대’라 불리는 곳은 일반 책장과는 다르다. 되도록 많은 책을 ‘꽂는 형식’으로 보관하는 곳이 책장이라면, 매대는 되도록 책이 잘 보이게끔 ..

[유희경의 시:선] 초가을 생각 [문화/ 2023-09-06]

가장 위험한 스티로폼을 훔치고 - 이서하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헐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흔드는 것 없이 휘청거려서, 쓰러질 듯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해서, 나보다 나무를 앞에 두고 걸었다 생각하기. 아무 생각하기. 발미를 감추고 생각하기 비할 짝이 없는 생각 (이서하 시집 ‘조금 진전 있음’) 초가을 생각 현관문을 나서면 느닷없이 시원해진 날씨. 계절 사이에도 문이 있는 모양이다. 안과 밖이 문짝 하나 차이이듯 여름과 가을도 하루 차이이지 않을까. 여전히 볕은 뜨겁고 멀리 매미 울음 들리는 것 같고 잎들은 무성하고 푸릇하지만, 구월이 되면 가을. 출근길 버스 안 승객들을 둘러보다가 어제 아침과 다른 점을 발견한다. 그 누구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대신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고 ..

[유희경의 시:선] 그럼에도 비우지 못하는 것 [문화/ 2023-08-30]

비운다는 것 - 김명인 비운다는 것은 철없던 슬하를 떠나보내고 그리움도 습관도 내려놓는 것, 젊은 날엔 한 해가 멀다 하고 옮겨 사느라 짐꾼처럼 이력이 붙었는데 지금은 갈 곳 있어도 허둥대니 쌓아온 적폐 내다 버릴 일이 걱정인가 (김명인 시집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 그럼에도 비우지 못하는 것 무사히 이사를 마쳤다는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가득 책 짐을 찍어놓은 사진이 덧붙어 있다. 절로 한숨을 짓게 된다. 읽고 쓰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책이란 숙명이지만 ‘이사’ 앞에서는 골칫거리이기도 한 것이다. 한낱 종이로 만든 것이 어쩜 그리 무거운지, 견적을 내러 온 사람의 한숨과 함께 ‘따블’이 되는 이사 비용은 책과 사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집에 놀러 온 조카가 천진하게 물은 적이 있다. ..

[유희경의 시:선] 좋아한다는 용기 [문화/ 2023-08-23]

인절미 콩빵 - 한연희 하지만 싫어한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에요 안 좋아한다는 것은 단지 조용하길 원하지만 매일매일 라디오를 켜는 습관 같달까. 그냥 아나운서의 목소리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듣는달까 그런 거예요 매사 심각해질 필요는 없어요 (한연희 시집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좋아한다는 용기 시인 구의 첫인상이 마냥 좋았던 건 아니다. 그의 탓이 아니다. 헌칠한 키, 중저음의 목소리, 능글맞아 보이는 사람 좋은 웃음. ‘언제 보았다고 반가운 척이지.’ 일단 의심하고 좋아하지 않기. 나의 천성이다. 덕분에 우리는 한참 지나서야 가까워졌다. 아니지. 경계와 냉소는 결과 값일 터다. 그러니까 나의 천성이란, 겁이 많은 것이겠다. 낯선 것이 두렵고, 알지 못하는 것이 걱정돼 무작정 밀어내고 미워하고 만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