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문 - 사가와 치카
그 집 주변에는 인간의 낡은 사유가 쌓여 있다
-마치 묘비처럼 핏기 없이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나는 문득 꽃이 핀 줄 알았다
그것은 나이 먹은 한 무리의 눈이었다
(사가와 치카 시집 ‘계절의 모노클’)
눈 내린 다음 날
주말 출근길. 버스 차창 너머가 온통 하얗다. 겨울이다 새삼. 두툼하게 챙겨 입도록 만드는 세찬 바람에도, 그래 놓고도 덜덜 떨게 되는 영하의 기온에도 실감하지 못한 계절감을 저, 소복하고 새하얀 눈 덕분에 느낀다. 누가 뭐래도 겨울의 왕은 눈이다. 저것이 없다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눈이 오면 일단 걱정이 먼저다. 길이 막히겠네. 서점 앞이 미끄러워지겠네. 귀찮고 번거롭고 위험해서,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한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거겠지. 어릴 적 감탄과 만끽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일단 장갑 먼저 찾아 끼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서던, 아무하고나 눈싸움하고 낑낑거리며 눈사람을 만들던 해맑음은 간 곳 없다. 그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이미 너무 어른이 된 다음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엔 눈사람이라도 만들어봐야겠다, 눈 예보를 접한 날부터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눈은 황사 눈이란다. 맞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우산을 펴들고 눈 아래를 오가고, 거리 곳곳 허옇게 뿌려진 염화칼슘 때문에 쌓이기도 전에 진창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것도 ‘상실’이라 생각한다. 눈이 내려도 눈이 오지 않는 것과 진배없는 것 아닐까.
눈이 오면, 공휴일 삼아 하루 쉬면 어떨까. 어른들은 모여서 넉가래로 눈을 치우고, 아이들은 눈 장난을 치면서 하루를 보내는 거지. 시간이 남으면 창밖을 구경하며 따뜻한 차나 한잔 하는 것이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철없기만 한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내릴 때가 되었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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