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예쁜 종아리 - 황인숙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황인숙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삶이라는 언덕
인근 도서관에 납품하러 가는 길. 1㎞나 될까 싶게 가깝지만, 길목에는 제법 높은 언덕이 있다. 책을 가득 담은 수레를 세워두고 고민한다. 질러가면 힘이 들 것이며, 돌아가면 오래 걸릴 것이다. 실은 전번에도 전전번에도 같은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동일한 결론을 내렸었다. 지름길로 가자.
어찌 이리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인가. 중턱쯤 멈춰 서서 헉헉대면서, 전번과 전전번의 후회를 뒤늦게 기억해내는 것이다. 결국 돌아간 것과 진배없는 시간이 걸릴 거였다. 하지만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언덕이었다.’ 미당의 시구를 변용해 중얼거리곤 키득거렸다. 가빠진 숨 때문에 기침을 몇 번 하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늘 언덕에 살았다. 어릴 적 동네도, 대학이나 직장도, 옛사랑의 집도 모두 언덕 위에 혹은 언덕 어디쯤에 있었다. 어쩌면 야트막한 오르막길에 불과할 수도 있었을 그 모든 길을 나는 참 가팔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덕의 속성이 삶의 면모와 닮아서일까.
애당초 질러가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애를 쏟은 성취조차 허망한 기쁨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무엇보다 가파른 오르막 너머에는 아득한 내리막이 기다린다는, 그토록 뻔한 사실을 언덕에서 배웠다. 그것은 여태 살아오면서 거듭 깨친, 모두에게 공평한 삶의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수레를 끌어 본다. 그러면 내리막이 나올 것이며, 결국은 내가 닿고자 하는 곳에 도착할 것이다. 다만 돌아올 때는 부러 에두른 길을 걸어야겠다, 생각했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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