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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개 이야기 - 김수호 (1940~ )

집개 이야기 - 김수호 (1940~ ) 세 번 집개를 키워 본 적이 있소 첫 번째 개는 똥개 수놈 두 번째, 세 번째는 진돗개 암놈이었소 똥개는 식색食色에 충실하여 킁킁거리며 밤낮없이 쏘다니는 색골에 소리만 요란했지 물줄은 모르오 임자 만나면 꼬리 내리고 쥐구멍 찾기 바쁘오 그러다 밤손님의 미끼에 낚여 죽었소 제 팔자대로 개죽음이었소 그러나 진돗개는 표 나게 달랐소 뒤창문 뜯고 들어온 밤도둑을 쫓은 일도 있소 일류 집지킴일 뿐만 아니라 주인의 뜻이라면 죽음도 불사하오 요즘 국회의 '회'를 '개'로 바꾸며 비웃소 그게 진돗개란 뜻이면 좀 나을는지 (170613)

[유희경의 시:선] 손의 일 [문화/ 2023-07-19]

잡아주는 마음 - 김영미 문을 잡고 모르는 사람을 기다려주는 아는 마음과 같은 소리를 내며 물을 내리고 다른 수도꼭지를 들어 올린다 거품 속에서 손가락 사이사이가 친해진다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된다 빠져나가지 않는 힘을 확인한다 이것은 나와 나의 작용 (김영미 시집 ‘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 손의 일 우산의 손잡이를 꼭 쥐고 젖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인데, 앞서가는 두 사람이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있다. 손잡이를 나란히 쥔 두 사람 손에 눈길이 간다. 서로의 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상대를 위해서라면 내 어깨 젖는 것쯤은 상관없다는 다정. 그들과 나, 셋만 아는 비밀이 좋아서 싱긋 웃고 만다. 식당 앞에선 문을 붙들어주는 손이 있다. 비에 젖지 말고 들어오라는 배려다. 작은 선의고 커다란 기쁨이다...

[최영미의 어떤 시] 우산 - 박연준(1980~) [조선/ 2023-07-17]

우산 - 박연준(1980~)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우산을 소재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이 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깜찍하고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어에서 젊음이 느껴진다. 시인은 우산이 되어, 비를 기다리는 우산의 마음을 헤아린..

돌아온 곳 - 김수호 (1940~ )

돌아온 곳 - 김수호 (1940~ ) 난 늘 돌아갈 꿈을 품고 살았다 고향 섬 제주도! 객지의 연분 반세기를 뒤로하고 드디어 돌아왔다 내 고향으로 내가 태어난 읍내에서 남으로는 맑게 확 트인 백록담을 벗하며 북으로는 수평선의 문안을 즐기던 어린 시절 우리 집 정경이 깃든 그런 집 짓고 죽마지우들과 옛정 나누며 저세상에 여생을 잇대고 싶었다, 그러나 추억의 고향 모습은 어디로 갔나 모두 떠나 버린 일가친척 고집만 튕기는 형제들 세월의 급류에 휘말린 죽마지우들, 게다가 말소리마저 범벅인 세상인심 어쩌다 안방 주인마저 바뀔줄이야 오로지 눈익은 풍경 하나, 비양도! 이곳은 어머님의 마지막 꿈이 내 눈길을 막아서고, 농촌 근대화의 성지, 이시돌 목장! 이 또한 하늘에서 땅속까지 휘어잡은 도야지 본색이 감당 불능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로맨스 - 서효인(1981∼ ) [동아/ 2023-07-15]

로맨스 - 서효인(1981∼ )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내 이름을 검색하고 빌어먹을 동명이인들 같은 직군들 또래들 심사위원들 수상자들 주인공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데 남들은 괴이쩍게 평온하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시는 좀 고리타분하지 않으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 시를 보여주고 싶다..

산사태 - 김수호 (1940~ )

산사태 - 김수호 (1940~ ) 하늘 아래 젤로 귀해하는 정원을 상처 내며 숨기는 불량 양심에 꼼지락대는 장맛비가 못 마땅했는지 다시 먹구름을 불러드려 산고개를 물고문 빗물통에 몸체 처박고 벌컥벌컥 항아리 배를 만드네. 어,어! 꼭 끼어 타지려는 실밥 한 올 뜯자 퍽 하며 터지는 벌건 속살, 더불어 토해 내는 잡쓰레기 늘 돌아서서 꿍치는 인간은 깨치려나 자해의 고통마저 무릅쓰다니 어찌 말리려나 이 하늘의 노기怒氣를. (140527)

발바닥 간질이며 - 김수호 (1940~ )

발바닥 간질이며 - 김수호 (1940~ ) 중산간의 맑은 샘물이 흘러흘러 아랫동네 논밭 물대기에 큰 몫을 하다 어느 장마철 산사태山沙汰로 꽉 막혀 버린 이 샘물의 물길 떠밀리 듯 바위 틈새로 스며들밖에 깜깜절벽인 땅속을 더듬더듬 가는 곳도 모른 채 마냥 허우적대다 어디쯤인가 빛줄기에 낚여 모래를 떨어내며 솟아오르긴 했지만 참 안됐다, 하필이면 바닷속이냐 헛길에 들었어도 계속 흐를밖에 이제 쓰일 데라곤 단 하나 해수욕 즐기는 개구쟁이들의 발바닥 간질이며 낄낄대는 일뿐이니 아, 만물의 근원이란 구실이여 (200108)

[유희경의 시:선] 우연의 힘 [문화/ 2023-07-12]

돌아오는 우연 - 강혜빈 우연의 눈을 보면 흔들리는 촛불처럼 영원히 순해질 수 있다 우연은 찻잔을 비우고 풀썩 일어선다 나는 따라 일어선다 주변을 둘러보니 서 있다 우리만 너무 언젠가 같은 장면에서 헤어진 적 있던가 그때 레몬차를 쏟았던가 그러나 우연은 돌아왔다 (강혜빈 시집 ‘미래는 허밍을 한다’) 우연의 힘 시집서점을 운영한 지 7년이 되었다. 매년 서점 생일이 되면 이벤트를 마련했다. 낭독회를 하거나 굿즈를 만들거나. 하여간 시집서점이란 이유만으로 응원과 격려를 주저하지 않는 마음들을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올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SNS에 7주년을 알리는 메시지와 간략한 감사 인사를 표하는 정도로 갈음했던 까닭은, 그간 나의 노력은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매..

초복初伏날 - 김수호 (1940~ )

초복初伏날 - 김수호 (1940~ ) 장마 말미 모처럼 맑은 날 공원의 노송 밑 벤치에 몇몇 낯익은 아파트 노인들 어깨쭉지 눅눅한 건 마파람 탓이라며 쩝쩝거리고 공원 옆 초등학교 운동장에 왁자지껄 개구쟁이들 더위 구덩이 헤집은 마음은 내 녹슨 여름 방학 종을 울리며 해수욕장을 휘적일 텐데 점심 전에 어김없이 강아지랑 산책하는 금발 아낙네 복날이라고, 아무려면 혼자만 몸보신하러 나갔겠나 하필 오늘 따라 안 보이니 (100719)

[최영미의 어떤 시] 꿈같은 이야기 - 김시종(1929~) [조선/ 2023-07-10]

꿈같은 이야기 - 김시종(1929~) 내가 뭔가 말하면 모두가 바로 웃으며 달려들어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마” 해서 나조차도 그런가 싶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꿈꾸려 한다 그런 터라 이제 친구들은 놀리지도 않는다 “또 그 이야기야!” 하는 투다 그런데도 꿈을 버리지 못해서 나 홀로 쩔쩔매고 있다. (곽형덕 옮김) 나도 내 꿈을 여태 버리지 못해서 홀로 쩔쩔매고 있다. 버릴 수 있다면 꿈이 아니겠지. 꿈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어느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다”라는 묵직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의 시집 ‘지평선’에서 내가 가장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