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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기 - 김수호 (1940~ )

반항기 - 김수호 (1940~ ) 스산한 초가을 한밤중에 철썩대는 파도 뭉개며 달립니다 서부두 방파제를 트랙 삼아 그 끝머리 등대에 기대서서 파도 끝자락 잡고 웁니다 더는 적실 가슴이 없을 때까지 주린 목숨 걸고 되돌아오지만 아버지 같이 믿었던 형은 없습니다 출발점인 방파제 초입에는 기껏 방파제 끝 등대밖에 모르는 몸뚱이만 자란 애 때문에 엄마만 떨며 울고 있습니다 (170602)

[유희경의 시:선] 나의 날들 [문화/ 2023-08-09]

오늘의 달력 - 유현아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유현아 시집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나의 날들 서너 해 전부터 일력이 유행이다. 예전 할머니·할아버지 댁에 걸려 있던 것처럼 커다랗지 않다. 오히려 손바닥만 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기 딱 좋은 크기다. 얼핏 보기에 귀엽고 재미난 듯하나, 이것 또한 낭비가 아닌가 싶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기가 사그라들긴커녕 일종의 관례가 된 모양인지 올해는 여러 출판사가 일력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때마침 누가 선물을 해준 것도 있고 해서 올..

꿍꿍이속 - 김수호 (1940~)

꿍꿍이속 - 김수호 (1940~ ) 한반도를 관통하는 태풍 제주도를 지나며 힐끔 뒤돌아보는 솔릭*(족장) 일본 쪽에서 뒤따라오는 시마론**(황소)을 보고 무슨 꿍꿍이속인지 한눈팔다 미끌, 냉탕 바닷물에 빠져 혈기 잃고 오들오들 바닷고기의 해장감이 되네 제 갈길이나 갈 일이지 황소가 탐이 났나 괜스레 뒤는 돌아봐 갖고 * 미크로네시아 전설 속의 족장 ** 필립핀의 황소 (180823)

[최영미의 어떤 시] 매실을 따고 있네요(摽有梅) - 작자 미상 (조선/ 2023-08-07]

매실을 따고 있네요(摽有梅) 매실을 따고 있네요 일곱 개만 남았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날 좀 데려가세요 매실을 따고 있네요 세 개만 남았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지금 빨리 오세요 매실을 다 땄네요 광주리에 담고 있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말만이라도 해주세요 - 작자 미상, 출전 (이기동 옮김)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詩經)’에 실린 노래다. 매실이 익을 무렵 그녀의 청춘도 무르익어 날 좀 데려가 달라고 임을 부른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 매실을 따며 부르던 민요일 텐데, 초여름에 매실을 따는 고된 노동이 사랑 노래를 부르며 좀 가벼워졌으리라. 반복되는 후렴구 “나를 찾는 임이시여”의 앞뒤가 재미있다. “일곱 개만 남았네요.” “세 개만 남았네요.” 일곱 개 남은 매실이 세..

카테고리 없음 2023.08.07

단풍과 낙엽 - 김수호 (1940~ )

단풍과 낙엽 - 김수호 매달린 건 단풍 떨어지면 낙엽 가을 하늘이 맑고 높게 이어지면 숱한 눈동자 속에 단풍은 노주빨로 불타지만 얼마를 더 버틸는지 제집에 매달려 있을 때 그나마 존재의 의미가 빛날 뿐 떨어지는 순간 이내 귀찮은 쓰레기 신세 당장은 낙엽이야 외롭겠지만 어차피 시간 문제 한 오리 찬바람이면 끝장날 터 떨어지는 곳이 모두의 종점 아닌가 단풍이 떨어져 낙엽이 되니까 (171128)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울고 싶은 마음 - 박소란(1981∼ ) [동아/ 2023-08-05]

울고 싶은 마음 - 박소란(1981∼ ) 그러나 울지 않는 마음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버스에 앉아 울지 않는 마음 창밖을 내다보는 마음 흐려진 간판들을 접어 꾹꾹 눌러 담는 마음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없겠다 없는 마음 비가 오면 비가 오고 버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나는 다만 기다리는 것 (하략) 그 사람 왜 좋아하냐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좋은 데에는 이유가 없다. 어느 순간 ‘아!’ 하고 좋아지는 거다. 박소란 시인의 작품은 그렇게 좋아지는 시다. 잔잔하게 다가와 오래 수런거리는 시. 첫 시집 제목처럼 ‘심장에 가까운 말’의 시. 이런 시를 좋아하신다면 박소란 시인이 정답이다. 나도 언제 새 시집이 나오나 서점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특히나 그의 시는 힘들 때 ..

해충 - 김수호 (1940~ )

해충 - 김수호 (1940~ ) 성당이라고 모기가 없을까 미사 중에도 신심 모임 중에도 찰싹! 보이는 족족 가차없이 압살 신비의 존재이기는 매한가지지만 사람에겐 해충일 뿐이니까. 세계 곳곳에서 별별 사람이 다 몰려드는 나라에 총기 소유가 불가능했다면, 전범국 머리에 원자탄을 떨굴 수 없었다면, 어찌 그 나라가 지탱되며 세계 경찰의 몫을 감당 했을까. 안팎의 해충 인간 떼로부터 제대로 나라와 국민 지키려면, 먼저 없어서는 안될 희생 제물로 하늘이 그런 해충을 만들었다는 믿음을 지녀야 하리, 본연의 인류가 존속하게끔. (160930)

[유희경의 시:선] 여름 낙엽 [문화/ 2023-08-02]

감정의 경제 - 천서봉 저 하늘, 살 수 있나요? 구름은 어제보다 상승해 있고 오늘도 우리의 감정은 고독의 하한 근처를 서성거렸는데요 바닥났던 잔고의 겨울나무들이 꽤 살 만해진 여름입니다 가을까지 좀 기다려주겠습니까? 당신에 대한 나의 기색은 근처 단풍나무에 넣어두겠습니다 (천서봉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여름 낙엽 장마 끝 무렵.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서점 앞에 낙엽들이 잔뜩 내려앉아 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나는 느닷없는 풍경에 멈춰 서고 말았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인데 낙엽이라니. 몇몇 잎이 나뒹구는 정도라면 성미가 마른 녀석들이네, 혀를 차고 잊을 일이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살펴보았다. 바짝 마른 작은 잎이다. 한가득 초록 잎을 이고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

늙은 코흘리개 - 김수호 (1940~ )

늙은 코흘리개 - 김수호 (1940~ ) 고효순 요안나, 우리 6남매의 어머니 아버지와 사별 후 53년 어머님의 별세 후 24년 못난 자손들을 위하여 볼모가 된 채 가족묘지의 모퉁이에 외로이 계시다, 드디어 아버지가 마련한 큰 집으로 옮기시네 오늘은 5.18 기념일, 광주는 학생항일운동에 부모님의 족적이 숨쉬는 곳 따뜻한 봄볕의 축하를 흠뻑 받으며 국립대전현충원의 아버지 유택에 놓인 어머님 영정 해묵은 그늘을 벗고 환하게 미소짓는 듯 그 모습이 너무나 곱고도 평온하구나 살아생전 불효에 용서를 빌며 남기신 뜻과 말씀의 다짐도 깡그리 잊은 채, 나는 피난 시절 양식 챙겨온 엄마를 맞는 듯 아버지와 재회하는 부활의 신비를 보는 듯 그저 기쁨에 들떠 훌쩍대네 일흔 넘은 늙은 코흘리개가 되어 (110519)

[최영미의 어떤 시] 아침 식사 -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조선/ 2023-07-31]

아침 식사 -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버렸지 말 한 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 버렸지. (김화영 옮김) 때는 아침, 장소는 카페인가 가정집인가? 적당히 붐비는 카페는 헤어지기 좋은 장소이다. 짧게 끊긴 문장들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시나리오 같은 시. 한 행의 길이가 아주 짧다. 커피를 마시고 빗속으로 떠난 남자의 몇 분간을 카메라처럼 담담하게 묘사했다. 자크 프레베르(1900~1977)는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