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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바윗돌 - 김수호 (1940~ )

깨어진 바윗돌 - 김수호 (1940~ ) 제값을 받지 못하는 금이 간 원석처럼 깨어진 바윗돌이 어찌 정원의 호사를 탐할까 화장 벗긴 민얼굴 삶에 짓눌리며 용쓴 상처가 따가운 햇볕에 우물처럼 타 들어갈 뿐 더는 감출 게 없어 나뒹굴다 거듭 토닥토닥 다듬어 풍우 설한의 방패가 된들 누굴 탓할 일이야 아닐망정 버려지는 허망에다 깨어져 눌리는 신음 소리로 마디마디 묶어세운다 난공불락의 성채를 (110629)

[최영미의 어떤 시] 남해 금산 - 이성복(李晟馥 1952~) [조선/ 2023-08-21]

남해 금산 - 이성복(李晟馥 1952~)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잘 다듬어진 조각 같은 작품이다. 그 아름다운 이미지가 단순 명료한 제목과 함께 내 뇌리에 박혀 있다 어느 여름날 불현듯 떠오른다. ‘그 여자’를 따라 돌 속에 들어간 사내. 사랑하면 어디든 못 가리. 지옥 불 속에라도, 망망대해 외딴섬에라도, 북극에라도 기꺼이 따라가겠지. 예스러운 ‘~네’로 끝나는 행들. 시를 베끼며 우리나라 오래된 시가의 전통과 맞닿은 ‘남해 금산’의 서정적 운율이 새롭게 다가왔다. 시에서 사..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새들은 저녁에 울음을 삼킨다네 - 유종(1963∼ ) [동아/ 2023-08-19]

새들은 저녁에 울음을 삼킨다 - 유종(1963∼ ) 전깃줄에 쉼표 하나 찍혀 있네 날 저물어 살아 있는 것들이 조용히 깃들 시간 적막을 부르는 저녁 한 귀퉁이 출렁이게 하는 바람 한줄기 속으로 물어 나르던 하루치 선택을 던지고 빈 부리 닦을 줄 아는 작은 새 팽팽하게 이어지는 날들 사이를 파고 들던 피 묻은 발톱들 줄을 차고 날아오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 지하로 곤두박질하고 싶은 본능 둥지에 재울 시간이면 흐느낌의 진실은 땅속으로 흐르고 추락하는 새의 붉은 슬픔을 안다네 그래서 숲에 들기 전 노을 든 하늘을 날다 스스로 붉은 슬픔이 되어 울음을 삼킨다네 이 고요한 풍경은 어디에서 왔을까. 적막한 시간을 오래, 자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시인은 평생 철도원으로 살았다. 이력을 알면 우..

삶의 전범典範 - 김수호 (1940~ )

삶의 전범典範 - 김수호 (1940~ ) 시험답안지의 정답엔 맞는 것만 찾으라 하지 않고 틀린 것도 찾으라 하네 정답을 따르는 것만큼 오답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지 반면교사도 교사이듯 삶의 길이 포장도로만인가 비포장길투성인지라, 당연히 장애물 피할 줄도 알아야 특히, 삶의 전범에 실린 다행감으로 꾀어내는 실패담이 무개념을 다독일 수 있음도... (180315)

[유희경의 시:선] 나란히 앉아주는 사람들에게 [문화/ 2023-08-16]

증명 - 김뉘연 빛을 나누어 쓰기로 하고, 나란히 앉는다. 흩어지는 시간을 각자 함께 바라보는 시간까지. 빛을 만져 누구의 시간을 밝혀내기로 한다. 그것이 빛이 아니라 해도. (김뉘연 시집 ‘문서 없는 제목’) 나란히 앉아주는 사람들에게 ‘시공간’이란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모든 것이 바짝 붙어 있는 시대에, 전송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문자는 물론이요, 사진이나 동영상도 전달할 수 있는 요즘 같은 때에, 관제엽서 같은 것을 판매할까 싶었다. 역시나 우체국에서도 뜻밖의 주문이었던 모양이다. 한참 찾아 엽서를 꺼내주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여러 형식이 있듯, 전달하는 방식과 수단 역시 따로 있는 법이다. 문자메시지로 가볍게 전해야 할 소식과, 이메일로 상세히 전해야 할 소식이 따로 있지 않은가. 그러니 엽서..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김수호 (1940~ )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김수호 (1940~ ) 내가 땀 흘려 농사지은 쌀을 나라에서 공출해 가더니 그게 왜놈 군대의 군량미가 되고 빼앗아 간 놋그릇 제기는 전쟁판의 총탄으로 둔갑하고 소나무를 잘라 짜내는 피같은 송진을 전투기의 기름으로 쓰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웃의 큰놈은 병정으로 끌려가 '덴노 헤카 반자이' 외치며 전사했고 건너 마을 딸부자 둘째는 왜놈 군 위안부로 몸 시주 당하고 인기 가수는 왜놈 군가 음반 내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군들 밥 굶고 살 재간 있나요 일본말 쓰며 선생이나 면서기를 하더라도 식솔들 밥은 먹여야지요. 임금이 어벙하여 나라를 잃은 탓에 순박하고 말 잘 듣는 백성들이 졸지에 친일파로 낙인 찍히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 자식도 창씨개명 하고서 조..

[최영미의 어떤 시] 억왕손, 하사(憶王孫·夏詞) - 이중원(李重元) [조선/ 2023-08-14]

억왕손, 하사(憶王孫·夏詞) - 이중원(李重元) 작은 연못 물풀들 바람 스치는 소리 비 그친 뒤 정원 연꽃 향기 가득하고 우물에 담근 오얏과 참외 눈처럼 얼음처럼 시원하네. 대나무 평상 위에서 바느질거리 밀쳐 두고 낮잠에 빠져 버렸네. (류인 옮김) 그 옛날 한가로운 우물가 풍경이 눈에 그려지지 않나. 무더운 여름날, 우물에 담근 참외를 먹고 평상에 앉아 바느질을 하려는데 졸음이 몰려와 단잠에 빠진 여인의 시각으로 묘사했으나 작자는 북송 말에 살았던 (남성) 문인 이중원이다. 여성이 문필 활동을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남기기 힘들던 때 ‘하사’와 같은 노래 가사를 통해 당시 중국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송나라의 문학 양식인 송사(宋詞)에는 매 수(首) 곡조명이 있는데 이를 사패(詞牌)라고 불렀다. ..

이념 애꾸 - 김수호 (1940~ )

이념 애꾸 - 김수호 (1940~ ) 세계 10위의 국력 자랑스럽다 이승만의 방향키 자유민주주의 박정희의 추진 동력 시장경제 북한에 체제경쟁 선언, 그리고 압승 이보다 확실한 판세가 어디 있나! 주사파는 졸업 후 뭘 더 배웠나 학생 때 얻어 들은 이념 애꾸의 동문 그 설레발 때문에 창피스럽다 동문 안 하고 싶겠다 (23-06-1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여름의 칼 - 김소형(1984∼ ) [동아/ 2023-08-12]

여름의 칼 - 김소형(1984∼ ) 화난 강을 지난 우리는 툇마루에 앉았다 참외를 쥐고 있는 손 예전부터 칼이 무서웠지 그러나 무서운 건 칼을 쥔 자의 마음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칼은 알아야 한다 여름의 창이 빛나고 열차는 북쪽으로 움직이고 강가에서 사람은 말을 잃고 있었다 (하략) 우리 현대시에서 ‘칼’이란 자주 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시인들은 꽃이나 나무, 별이나 달빛을 간절히 쥐고 싶어 했지, 칼은 즐겨 잡지 않았다.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가까이에서는 이형기 시인, 조금 더 멀리서는 유치환 시인에게서 칼의 시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시인은 연약한 자아를 단련시키려는 뜻에서 칼의 이미지를 가져왔다. 다시 말하자면 내적이고 강한 정신력이 바로 칼의 진짜 의미였다. 결코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