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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면 안 먹으면 된다 - 김수호 (1940~ )

비싸면 안 먹으면 된다 - 김수호 (1940~) 걷기 운동 중에 아내의 한마디 오일장에도 부로콜리 값이 세 배나 뛰었다며 이어지는 시국 강연 지금은 과체중-과영양 시대 여태껏 온몸에 비축한 영양이면 한 달은 더 버틸 수 있다 그러하니 비싸면 안 먹으면 된다 얼씨구, 연설 끝나기 바쁘게 잰걸음으로 날 잦히고 앞서 간다 여성 대통령 후보 지원 유세가 있었단다, 그 오일장에서 (121208)

[최영미의 어떤 시] 향수(鄕愁) - 김기림 (金起林 1908~?) [조선/ 2023-09-25]

향수(鄕愁) - 김기림 (金起林 1908~?) 나의 고향은 저 산 너머 또 저 구름 밖 아라사(俄羅斯·러시아)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 나는 문득 가로수 스치는 저녁 바람 소리 속에서 여엄-염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선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제목 ‘향수(鄕愁)’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겹고 아련하다. 어떤 요란한 기교도 부리지 않고 편안한 시어들. 3행이 1연을 이루는데, 아래 행으로 갈수록 행이 길어지고 넓게 퍼진 모양이 마치 산자락이 펴지듯 시각적인 재미를 준다. 김기림은 1930년대 조선 문단에서 가장 앞서가는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산문 작가였다. 2행에서 ‘저 산 너머’ 뒤에 ‘저 구름 밖’의 대구도 절묘하다. ‘구름 밖’ 뒤에서 행이 끝나, 갑자기 낭떠러지처럼 끊어진 공간감을 ..

효과 보증 - 김수호 (1940~ )

효과 보증 - 김수호 (1940~ ) 부부가 걷기 운동 한 게 30년이 다 돼 가는군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오가는 사람 구경에 철 따라 꽃 구경도 하면서 새소리도 즐기지만 운동 효과를 여과 없이 보증하는 큰소리 '꺼억' 토하는 위장포뿐인가 '뿌웅' 터지는 항문포 그때마다 누구 없나 힐끗힐끗 뒤돌아보던 아내가 이젠 고개가 곳곳하네 (23-09-23)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코스모스 - 김사인(1956∼ ) [동아/ 2023-09-23]

코스모스 - 김사인(1956∼ )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소설가 이태준의 수필 중에 ‘가을꽃’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갑자기 가을꽃이 짠하면서도 거룩하게 느껴진다. 이태준이 말한 것은 비단 꽃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짚어낸 가을꽃의 속성에서는 사람의 태도라든가 인생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꽃 하나를 놓고도 세월이라든가 우리네 삶까지 읽을 수 있다. 김사인의 이 시도 가을꽃을 제목으로 삼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시의 주인공이 코스모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되묻는다 - 김수호 (1940~ )

내가 되묻는다 - 김수호 (1940~ ) 형제나 진배없는 친구가 머뭇머뭇 입을 연다 부모가 대준 학비로 공부 마친 뒤 어미가 취직 시켜 아우는 밥시중들게 하고 아비가 짝 찾아 줘 결혼까지 했으면서 외아들인 아비 세상 뜨자, 제 새끼 먼저 챙기느라 홀어미며 어린 아우들은 뒷전일 뿐이고, 조부모 집 밭 팔아 제 집 마련하고 일제 장사 치맛자락에 말려 덮어쓴 게 얼마인지 아비가 평생 일군 가업마저 아작내더니 건넛섬 바닥까지 개같이 핥으며 어미가 생전에 챙기던 막내 몫도 가로채고, 아비 등뒤에 숨어 총 한 번 만진 적 없이 고관급 연금으로 나랏돈 축내면서 아비의 항일 후유증에 서른 해 넘게 빨대 꽂은 채 집안엔 흙 한줌 보탠 것 없는 화상이 따지는 아우한테 의절하자, 배 째라 하니... 내게 그 친구가 묻는다,..

젊은 땐 없던 병 - 김수호 (1940~ )

젊은 땐 없던 병 - 김수호 (1940~ ) 두 모녀가 공원 정자에 앉아 사이좋게 군것질을 한다 며칠 똑같은 그림이 거듭되니 집에선 며느리나 손주 눈치 때문일까 이건 집안의 병인 듯싶다고 제나름 머리 굴리며 걷다, 문득 남의 집안일까지 파고들다니 알지도 못하면서, 괜스레 별 쓸데 없는 걱정을 다 하는 이건 젊은 땐 없던 병이 아닌가! (180823)

[유희경의 시:선] 해주지 못한 말 [문화/ 2023-09-20]

며칠 후 - 김소연 조금만 더 그렇게 하면 예순이 되겠지. 이런 건 늘 며칠 후처럼 느껴진다. 유자가 숙성되길 기다리는 정도의 시간. 그토록이나 스무 살을 기다리던 심정이 며칠 전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편으로 기다리던 며칠 후는 감쪽같이 지나가 버렸다.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 해주지 못한 말 다 늦은 시간, 서점에 찾아온 어린 학생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애써 못 본 척하였다. 이럴 때 호들갑을 떨며 위로를 건네거나, 그럴 일이 아니다. 다그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줄 때이다. 막막하다고 한다. 대학 졸업이 목전인데 자신의 삶은 물음표투성이라서. 두렵다고 한다. 섣부른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될까 봐서. 잘 안다고 한다. ..

휜 허리 아비들 - 김수호 (1940~ )

휜 허리 아비들 - 김수호 (1940~ ) 꽉찬 곳간 물려받은 아비가 폼 잡느라 다 뿌리고 빈 껍데기만 자식한테 물려주고 독촉장, 소환장이 수북한 우체통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게 아비냐 탈바가지냐 나라 곳간 똑바로 간수하거라 밤새에도 뻥 뚤리는 걸 여러 해 넘기기가 그리 쉽겠느냐 열쇠 쥔 허수아비 하나 땜에 한 동네 살았단 죄로 휜 허리 아비들 모개로 넘어갈라 (171120)

[최영미의 어떤 시] 중난산 오두막(終南別業) - 왕유(王維 701~761) [조선/ 2023-09-18]

중난산 오두막(終南別業) - 왕유(王維 701~761) 중년이 되면서 불도에 심취하여 중난산 구석으로 최근 집을 옮겼다 마음 내킬 때면 혼자 이리저리 다니니 스스로 깨침보다 나은 일은 없으리 계곡물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 앉아 있으니 구름 일어나는 것이 보이네 우연히 숲속 늙은이를 만나게 되어 서로 이야기하던 중 돌아갈 시간을 잊었네 (류인 옮김) 당나라의 시인 왕유가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 자연을 노래하나 그 속에 늘 인간이 있고 깨달음이 있는 왕유의 시가 좋아지니 어느덧 중년을 지나 노년이라네. 처음 볼 때는 특별한 게 없는 듯하나 볼수록 좋아지고 자꾸 생각나는 시를 그는 썼다. 소동파의 시가 톡 쏘는 강렬한 맛이라면, 왕유의 시는 누룽지처럼 구수하다. 4행 “勝事空自知(승사공자지)”를 “좋은 일은..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적막이 오는 순서 - 조승래(1959∼ ) [동아/ 2023-09-16]

적막이 오는 순서 - 조승래(1959∼ ) 여름 내내 방충망에 붙어 울던 매미. 어느 날 도막난 소리를 끝으로 조용해 졌다 잘 가거라, 불편했던 동거여 본래 공존이란 없었던 것 매미 그렇게 떠나시고 누가 걸어 놓은 것일까 적멸에 든 서쪽 하늘, 말랑한 구름 한 덩이 떠 있다 여름은 격렬하다. 그것은 타는 듯한 열기와 소란스러운 매미 소리와 장맛비 같은 것으로 온다. 해가 갈수록 여름은 뜨거워지고, 세월이 지날수록 여름은 부담스럽다. 사는 일 자체도 경쟁으로 달아오르는데 거기에 여름의 열기까지 보태자니, 청춘도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가 지쳐 갈 무렵 여름의 격렬함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그 사라진 빈자리로 가을은 온다. 그러니까 가을은 지우면서 들어서는 계절인 셈이다. 소란스러움 대신 침묵하고 싶은 계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