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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 - 김성규(1977∼)[동아/ 2023-10-21]

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 - 김성규(1977∼) 어린 강아지를 만지듯 잇몸에 손가락을 대본다 한 번도 알지 못하는 감각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살 만한 것인가 이빨로 물어뜯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말한다 이를 잘 숨기고 필요할 때 끈질기게 물어뜯으라고 이렇게 부드러운 말 속에 피의 비린 맛이 숨어 있다니 그러나 그들은 늘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제는 살고도 죽고도 싶지 않은 나이 오늘도 나는 시장에 간다 뺀 이를 다시 사고 싶어 그러나 내 잇몸에 맞는 것은 없고 구름이 핏빛 솜뭉치로 보인다, 라는 구절을 생각해본다 나의 아버지는 시인이었는데 월급을 타면 서점을 돌며 문예지를 사셨다. 30년이 지나고 보니 나도 매달 문예지 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잡지에서 기억하고 싶은 시..

치과에서 - 김수호 (1940~ )

치과에서 - 김수호 (1940~ ) 2017년 12월 20일자 위에 붉은 표지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인데 여성 대통령을 철창으로 처넣고 새 대통령을 만든 '촛불'이 달력만 미처 불사르지 못한 불찰이네 대통령을 뽑기로 했던 날에 그런 일은 없어졌으니 난 투표소가 아니라 치과에 들려 새 대통령 대신 앓던 사랑니를 뽑았네 이것도 있으나마나 한 적폐였나 (171220)

[유희경의 시:선] 보이지 않을 뿐인 [문화/ 2023-10-18]

한밤의 공 줍기 - 조온윤 밤마다 떨어진 공을 줍는 사람이 있네 온종일 공을 날려보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미화원의 파업에 미화되지 않는 거리 세상에는 스위치를 내렸다 올리듯 요란함이 간단히 정리되는 마법은 없지 (조온윤 시집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보이지 않을 뿐인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시간도 아낄 겸 질러가 볼까. 매일 걷는 길의 반복이 지겨워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디뎌 보지 못한 길은 낯설고, 사는 모양은 비슷비슷 낯익다. 집집마다 내놓은 화분과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 사이를 걷다가 경계석 위에 버려진 일회용 플라스틱 컵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처럼 인적 드문 골목에도. 한숨이 나오지만 실은 어디에나 버려져 있지. 우리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지난 연휴의 풍경..

[최영미의 어떤 시] 감사 - 노천명 (盧天命 1912~1957) [조선/ 2023-10-16]

감사 - 노천명 (盧天命 1912~1957)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를 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나이가 들수록 포기가 빨라지고 욕망도 흐지부지, 내가 뭘 원했는지도 잊고 살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젊어서는 노천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에 그의 시선집을 읽고 그 투명한 언어에 실린 쓸쓸한 마음의 풍경에 측은지심을 느끼며 그에게 빠져들었다. 근대 최초의 여성 문인인 김명순도 그렇고 노천명도 그렇고, 앞서간 여성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편지 - 김남조(1927∼2023) [동아/ 2023-10-13]

편지 - 김남조(1927∼2023)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대시인께서 작고하셨다. 상복을 입고 출근했다가 장례식장에 찾아갈 참이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김남조 시인의 소식을 전하는데 금방 알아듣지 못한다. ‘겨울 바다’를 지은 시인이라니까 많이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는 시의 구절을 읊어주니 대부분 알아챈다. 시인은 ..

감나무를 보니 - 김수호 (1940~ )

감나무를 보니 - 김수호 (1940~ )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보니 한여름 옛집의 감나무가 생각난다 참새가 떼 지어 짹짹거리면 묻지 마 구렁이의 대목장 내방이라 기다렸다는 듯이 긴 장대로 후려 돌덩이로 짓이겼지 쥐 사냥 공로는 나 몰라라 땅꾼한테 넘길 것도 약에 쓸 것도 아니면서 징그럽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얼씬만 해도 소름이 돋지만 구렁이를 본 게 언제였는지 감나무를 보니 구렁이도 생각난다. (161120)

[한삼희의 환경칼럼] 경악할 기온 상승에도 밤잠 편히 자는 ‘기후 딜레마’ [조선/ 2023-10-11]

[한삼희의 환경칼럼] 경악할 기온 상승에도 밤잠 편히 자는 ‘기후 딜레마’ -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조선/ 2023-10-11] 9월 지구 기온 ‘역대 최고’보다 0.5도 높아 10년 상승치의 두 배 반 하지만 세계는 평온 해결책 없다고 아예 체념인가 ‘도덕적 혼돈’ 상황 유럽 기후 모니터링 기구인 코페르니쿠스가 지난달 지구 평균 기온(섭씨 16.83도)이 역대 9월 최고치(2020년)보다 0.5도 높았다고 5일 발표했다. 기후변화는 10년마다 0.2도 올라가는 속도로 움직여왔다. 그에 비해 지난달은 경악할 수준의 널뛰기였다. 엘니뇨 요인만 갖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역대 최고치 경신’은 6월부터 넉 달째다. 미국 민간 기후관측 기구인 버클리어스에 따르면 7월 역대 최고치를 0.26도, 8월엔 0.31..

[유희경의 시:선] 시 쓰기 좋은 계절 [문화/ 2023-10-11]

이 볼펜으로 - 이성부 이 볼펜으로 사랑을 적기 위해 한 점 붉디붉은 시의 응결을 찍기 위하여 오늘 밤 나는 다른 마음이 되고 싶다. 좀 멀리 다른 데를 보고 싶다. (이성부 시집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시 쓰기 좋은 계절 시 읽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시 쓰기를 권하곤 한다. 그런 제안을 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한 평론가로부터 “시인들은 사람들이 시 쓰기를 참 바라는 모양”이라며, 자신은 “한 열 번쯤 권유를 받은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시인 입장에서 시인이 많아진다고 딱히 좋을 것도 없거니와, 그건 제안을 받는 쪽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제안을 받은 사람은, “실은 그래 볼까 생각 중이다”며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를..

제주 앞바다의 하룻밤 - 김수호 (1940~ )

제주 앞바다의 하룻밤 - 김수호 (1940~ ) 해 지자 수평선 가로등으로 바뀐 집어등 환한 바닷속 고속도로 따라 밤새껏 폭주 어족들이 스피드를 즐기다 떼로 대형 사고에 휩쓸리고 그 생사 현장에 출동한 해경 구조대인 양 어선 무리가 밤샘 수습 임무를 완수한 듯 앞다투어 회항하며 만선 깃발에 피로를 푸는 새벽녘 뱃길 먼발치 종점 부두에 사고자 가족들인 양 어물상들이 판 벌이고 웅성거릴 즈음 하나둘 꺼지는 수평선 가로등 (17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