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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 시] 눈보라 - 문태준 (1970~) [조선/ 2023-12-11]

눈보라 - 문태준 (1970~)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눈보라’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눈보라가 두렵다기보다 신기했지만, 지금은 눈보라에 내 몸이 젖는 게 싫어 우산을 펼쳐든다. 그 매서운 눈 부스러기들을 정면으로 응..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높새가 불면 - 이한직(1921∼1976) [동아/ 2023-12-16]

높새가 불면 - 이한직(1921∼1976) 높새가 불면 당홍 연도 날으리 향수는 가슴에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지팡이 짚고 짚풀을 삼어 짚새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슬프고 고요한 길손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황나비도 날으리 생활도 갈등도 그리고 산술도 다 잊어버리고 백화를 깎아 묘표를 삼고 동원에 피어오르는 한 떨기 아름다운 백합꽃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이한직 시인이 이 시를 ‘문장’지에 발표했을 때가 1940년이었다. 유망한 청년 시인이 등장하자 정지용은 “젊고도 슬프고 어리고도 미소할 만한 기지를 갖춘 당신”이라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작품 수가 적고 활동한 기간이 길지 않아 지금은 전집 하나 남지 않았지만 이한직의 초기 시는 분명 눈부셨다. 일견 어두운 내용 같아 보이지만 죽고 싶다는 절망감보..

[유희경의 시:선] 마주하기 [문화/ 2023-12-13]

공고 - 민구 마주를 구합니다 그는 길들일 수 없고 작은 일에 짜증을 내며 당신이 상상하는 높이의 울타리를 가볍게 넘어갑니다. (민구 시집 ‘세모 네모 청설모’) 마주하기 스마트폰을 멀리 두고 지낸 지 몇 주가 흘렀다. 요즘 우리는 전화기로 전화 통화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전화 통화를 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벽을 바라보고 혼잣말을 하는 사람처럼 화면을 마주 대한 채. 스마트폰을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대개 이렇다.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걷는 사람들. 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연인들. 일제히 전화기 쪽으로 고개를 숙인 대중교통 안 사람들. 새삼스러울 것 없는, 문득문득 무섭고, 괴상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섬처럼 ..

[최영미의 어떤 시] 살얼음이 반짝인다/첫추위 - 장석남(1965 ~ ) [조선/ 2023-12-04]

살얼음이 반짝인다 / 첫추위 - 장석남 (1965~ )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은커녕 ‘논’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서워 멀리 도망갔다.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 갈 때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개 붙잡아 둬”를 애걸하곤 했는데, 내가 저를 무서워..

[시가 깃든 삶] 다정도 병인 양 - 이현승(1973∼) [동아/ 2023-12-09]

다정도 병인 양 - 이현승(1973∼)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두 살의 주인공에게로 울분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로 끝나는 시조의 한 구절이다. ..

[유희경의 시:선] 나와 나, 우리 [문화/ 2023-12-06]

거울과 거울 - 양안다 왼쪽 거울에 내가 보인다. 오른쪽 거울에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내가 보인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보인다. (양안다 시집 ‘몽상과 거울’) 나와 나, 우리 요 며칠 시무룩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기 때문이다. 나이 좀 먹었다고, 어릴 때와는 다르다고 방심했던 탓이다. 상자 안에는 나에 대한 온갖 평가와 정의가 담겨 있었다. 나와는 무관한 성질의 것이라 확신하던 정의들이 마음 이곳저곳에 엉겨 붙었다. “몰랐어? 너는 그런 사람이야.” 정말 몰랐다. 내가 그렇단 말인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의 섞인 변명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너는 너를 잘 모르는구나”라는 말도 듣고 말았다. 부정하면서도 그럴수록 나에 대..

[최영미의 어떤 시] 인연 - 황인숙(1958~) [조선/ 2023-12-04]

인연 - 황인숙(1958~) 맨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 너는 키다리. 맨 뒷줄이 네 자리 아, 우리가 어떻게 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 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 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 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 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 내 입은 벙글벙글. 마지막 두 행이 멋지다.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내 입은 벙글벙글”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친구를 보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친한 사람들은 멀리서도 서로 알아볼 수 있다. 중학교 동창, 오랜 벗들을 만날 때 나는 제일 편하다. 내가 뭘 잘못해도 친구들은 이해한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밥풀 - 이기인(1967∼) [동아/ 2023-12-02]

밥풀 - 이기인(1967∼)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 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 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저녁의 어둠 이 저녁의 아픈 모서리에 밥풀이 하나 있네 눈물처럼 마르고 싶은 밥풀이 하나 있네 가슴을 문지르다 문지르다 마른 밥풀이 하나 있네 저 혼자 울다 웅크린 밥풀이 하나 있네 혼자 먹는 밥상이 분명하다. 맛있는 반찬은 하나도 없고, 입맛도 없고, 살아야 하니까 먹는 식사임이 분명하다. 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니 퍼뜩 정신이 돌아왔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밥을 먹는구나, 먹..

[유희경의 시:선] 마음대로 [문화/ 2023-11-29]

마음 06:53 AM - 성기완 마음은 아주 멀리도 갑니다 안개와 함께 안개처럼 다닙니다 가는 비의 맘을 품고 마음이 그리는 그림은 때로는 방울 때로는 연기 때로는 경이로운 별자리 납작해진 초콜릿 무엇을 그리든 마음의 붓질은 운명이 됩니다 (성기완 시집 ‘빛과 이름’) 마음대로 한 소설을 읽다가 ‘마음’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마음을 ‘열리고 닫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대체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것은 어떻게 열리는 것일까. 문이 달려 있나. 미닫이일까 여닫이일까. 냉장고 속 잼 통처럼 생긴 것은 아닐까. 힘주어 돌리면 공기가 빠지며 개봉되는 형식. 마침내 겨울이다. 겨울에는 이러한 몽상이 잘 어울린다. 날씨와 관계없이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길을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늦은 ..

[최영미의 어떤 시]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조선/ 2023-11-27]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 토머스 하디(Thomas Hardy)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 황폐해지는 내 피부를 보네. 그리고 이렇게 말하네. “하나님께서 차라리 내 심장을 저렇게 수척하게, 사그라지게 하셨더라면!” 그러면 차라리 점점 싸늘해지는 심장이 나를 괴롭힐 리 없으니, 나는 평온하게 영원한 안식을 외로이 기다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세월’은 나를 슬프게 하려고, 어떤 부분은 빼앗아 가고, 어떤 부분은 남겨 두네. 그리고 한낮의 두근거림으로 이 저녁의 허약한 뼈대를 흔드네. (윤명옥 옮김) 소설 ‘테스’로 유명한 토머스 하디는 시도 곧잘 썼다. 특히 연애시를 잘 썼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네’는 하디가 나이가 들어 어떤 여인에게서 느낀 연애 감정을 에둘러 표현한 시. 강렬한 맛은 없지만 천천히 음미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