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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무엇 할까 - 김수호 (1940~ )

말해 무엇 할까 - 김수호 (1940~ ) 내 나라와 내 고향에 대하여 뻥튀기는 허풍쟁이나 진짜처럼 말하는 거짓말쟁이는 모두 내겐 안 좋은 사람이네 몸으로 겪은 날 속이는 거니까 또한 자기를 믿는 날 속인다면 더 안 좋은 사람이네 하물며 신앙을 앞세워 날 속인다면 말해 무엇 할까 하늘에 자비인들 어찌 구할 수 있을까 형제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영혼마저 짓밟고 회개하지도 않는, 할 수도 없는 원수를 피 흘린 형제보다 더 감싸며 (15120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무화과 숲 - 황인찬(1988∼) [동아/ 2023-11-04]

무화과 숲 - 황인찬(1988∼)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한눈에 반할 때가 있다. 처음 본 그 순간에 결정된다. 마음이 덜컥 기우는 건 의외로 순식간이다. 왜 반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 이유를 따져서 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를 한두 편 보는 게 아닌데, 이 시는 처음 보자마자 ‘너무 좋다’라는 반응이 먼저였다. 사람이 사람 아닌 것에 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황인찬의 이 작품은 알려주었다. 이 시에는 설명이 많지 않다. 쌀 씻는 저녁은 가까이 보이고, 사랑하는 꿈은 희미해 보인다. 그렇지만 시를 읽어가며 우리..

자매지간 - 김수호 (1940~ )

자매지간 - 김수호 (1940~ ) 젊은 부부가 어린 딸과 애완견을 데리고 공원 잔디밭에 넉넉히 자리잡고 앉는다 '아이구 예뻐라 우리 아가 아빠한테 가렴' 엄마의 말 떨어지기 바쁘게 뽀로로 달려가 아빠에게 먼저 안기는 강아지 예쁜 딸도, 졸지에 강아지와 자매가 되고 부부도 그들의 부모가 된다 아! 이 행복한 개판 (130109)

[유희경의 시:선] 현실, 비현실 [문화/ 2023-11-01]

무대륙 - 고선경 명백히 현실에도 대륙이 있고 나라가 있고 지역이 있다 심지어 집도 있다 집집마다 사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당신은 아는가! (떠난 모험가를 향하여) 게임을 종료하면 대륙을 떠나면 나는 나를 사냥해야 해 (고선경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현실, 비현실 서점에서 강의를 맡은 시인이 나타나지도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화가 났다가 나중에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초조해져 기다리는데, 그가 얼굴을 내민다. “어떻게 된 거야?” 화를 내는 나를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살피다 이내, 알았다는 듯 웃는다. 그가 내민 것은 플라스틱 장치였다. “이게 뭐야?” 묻자, 배시시 웃으며 “감옥” 하고 대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스마트폰 감옥’이다. 전화기를 넣고 덮어두면, 설정해놓은 ..

[최영미의 어떤 시] 날아가는 낙엽(Das treibende Blἁtter) - 헤르만 헤세 (1877~1962) [조선/ 2023-10-30].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ἁtter) -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 마른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내 앞을 날아간다. 방랑도 젊음도 그리고 사랑도 알맞은 시기와 종말이 있다. 저 잎은 궤도도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만 가서 숲이나 시궁창에서 간신히 멈춘다. 나의 여로는 어디서 끝날까. (송영택 옮김) 내 나이 또래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독일 작가, 한국에서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소설로 더 알려졌지만 시도 곧잘 쓴 헤세. 중학생 시절에 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나는 ‘사춘기 혁명’이라고도 할 만한 충격을 받았다. 헤르만 헤세의 책을 빌려 읽지 않았다면 나는 작가의 길을 걷지 않았고 오늘날처럼 독립적이고 개성이 강하고 ‘불편한’ 여..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화남풍경 - 박판식(1973∼) [동아/ 2023-10-28]

화남풍경 - 박판식(1973∼)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얼마 전에 박판식 시인이 상을 받았다. 수상 기사를 접하자마자 ‘화남풍경’이 떠올랐다. 시인의 첫 시집,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시인이 무언가를 자신의 첫 시집, 첫 페이지에 놓았다는 것은 운명이고 총체라는 의미다. 시인이 그 시를 고른 것이 아니라 그 시가 시인을 선택해 찾아왔다는 말이다. 이 아름다운 시를 사랑하여 추천한 이들이 많다. 처음에는 문태준 시인이, 그 다음..

알몸의 악몽 - 김수호 (1940~ )

알몸의 악몽 - 김수호 (1940~ ) 찾아온 봄에 자리를 내준 추위 난 두터운 외투를 벗었네 그러나 스며든 예년에 없던 꽃샘추위 꼼짝없이 집안에 틀어박혔네 칠흑 속에 가두고 저들만의 별 잔치 밤새 옷 벗기는 끈적한 이불 그 역한 악취에 방을 뛰쳐나가야 했네 아, 이렇게 완전 알몸일 줄은, 정말 춥고 배고파 떨며 움츠릴 밖에 난 주유소로 뛰어들었네 냉소의 총알이 박혀 쓰린 가슴 휘발유를 한껏 붓고 라이터를 켰네 퍽! 화염 속에 희나리 된 몸 그 재 한줌을 벗어버린 영혼 맹하게 떠밀려 내 별에서 떠나야 했네 아, 이렇게 띵한 악몽일 줄은, 차마 (110504)

[유희경의 시:선] 다른 숨 [문화/ 2023-10-25]

소설처럼 - 한여진 사람들은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역에서 출발해 이미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기차가 출발하면 창문에 비친 얼굴들은 자기만의 생각과 잠에 빠져 희미해지고 기차는 계속해서 멀어지다 이제 하나의 점이 되어버렸는데 이게 다 소설 속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여진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다른 숨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조용하고 느린 말씨를 가진 남자였다. 충남 논산에 있는 한 기관에서 일한다는 그는 바쁘고 번거롭겠지만, 그곳 지역에 특강을 와주십사 부탁했다. 거절하지 못했다. 한 시절 우리 서점을 방문하던 단골이라 자신을 소개해서라거나, 지역엔 문화생활에 목마른 사람이 많다는 설득 때문만은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홀렸다고 해야겠다. 소개하고..

K-웨스턴 / 권총 이야기 - 김수호 (1940~ )

K-웨스턴 / 권총 이야기 - 김수호 (1940~ ) 태평양 전쟁과 6.25동란을 겪으며 자란 어린 시절 가장 즐기는 놀이는 당연히 전쟁놀이었소 아이들이 가장 소망하던 무기는 대장만이 허리에 차는 권총이구요 크기야 손바닥만 해도 누구든 한 방에 보내 버리니까요 처음 가까이서 권총을 본 게 해방 이듬해 국민학교 1학년 때였소 구시렁대는 소리에 눈을 뜨니 아빠가 육혈포를 손에 쥐고 있었소 깜짝 놀라 일어나 앉자 소문 나면 다 죽는다며 입단속을 시켰소 그럴만 하지 제 나름 이해했소 아빠가 항일 운동으로 옥고 치르고 늘 일경 감시하에 살았으니까요 해방 이후 세상이 어수선하다 느꼈기에 입술 깨물며 무사히 넘겼소마는 '우리 아빠는 권총도 있다' 애들한테 자랑을 못해 죽을 뻔 했소 혼란기에 극성스럽던 밤손님은 경비대..

[최영미의 어떤 시] 참나무(The Oak) - 앨프리드 테니슨 [조선/ 2023-10-23]

참나무(The Oak) - 앨프리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 네 인생을 살아라, 젊거나 늙거나, 저 참나무처럼, 봄날엔 밝게 타오르는 황금빛으로 살다가; 여름엔 풍성하게 그리고; 때가 되면 가을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아 더 진중해진 색조로 다시 황금빛이 되지. 나뭇잎들이 기어이 다 떨어지고 봐라, 그는 서있지 나무의 몸통과 가지 벌거벗은 맨몸의 힘으로. 테니슨의 ‘참나무’를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행의 “벌거벗은 힘”이 주는 얼얼한 충격에 사로잡혀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는 노년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아름답게 보다니. 어떻게든 늙지 않으려, 늙어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시대, 21세기는 안티-에이징(anti-aging)의 시대라고 해도 무방하리. 시..

카테고리 없음 2023.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