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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의 시:선] 샤워를 하다가 [문화/ 2023-11-22]

눈사람 신비 - 황유원 한밤중에 뜨거운 물을 끼얹으면 좋은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사실 그건 생각이 아니라 기분인데 기분이 꼭 생각인 것만 같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분이 꼭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생각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황유원 시집 ‘하얀 사슴 연못’) 샤워를 하다가 겨울밤 뜨끈한 물로 하는 샤워. 비견할 즐거움이 또 있을까. 종종 샤워를 하는 도중, 머리를 감거나, 온몸에 비누칠을 하다 말고 문득, 겨울밤 샤워가 금지될 만한 극단적 상황을 상상하고 몸서리치곤 한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이 세계의 평화는 겨울밤 따끈한 샤워를 위해서라도 지켜져야 한다. 입을 앙다물기도 하는 것이다. 샤워기가 쏟아내는 온수 아래서 나는 온갖 상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오늘 있었던..

[최영미의 어떤 시] 감 - 허영자(許英子 1938~) [조선/ 2023-11-23]

감 - 허영자(許英子 1938~)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한 병을 들이부은 듯 가슴이 쓰렸다. 허영자 선생님은 현존하는 한국 시인 중에서 한국어의 맛과 향기를 가장 잘 구사..

일에게로 돌아오기[유희경의 시:선] 일에게로 돌아오기 [문화/ 2023-11-15]

일 앞에서 - 박세미 일 앞에서 나는 스스로를 인질 삼아 겁박한다. 나는 인질로서 겁에 질린 동물처럼 꼬리를 감치고 눈을 감고 어떤 발언도 삼간다. 이 인질극은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몇 번의 소나기에 흠뻑 젖었고, 몇 번의 폭설에 네 발이 얼었다 녹았으며 (박세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 일에게로 돌아오기 곧 착륙할 것이다. “오~” 하고 발음할 때의 입 모양을 닮은 창문 너머를 본다. 베를린으로부터 돌아오는 중이다. 구름 위의 하늘은 언제나 파랑. 비도 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야말로 순정한 파랑. 6박 7일 일정의 출장이었다. 지난여름에 잡힌 일정이었으나, 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출국 날짜가 다가올 즈음, 내심 이 출장이 취소되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출장을 제안한 출판사 대표는 내게 “휴가라..

[최영미의 어떤 시] 성성만(聲聲慢),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 이청조(李淸照, 1084~1155) [조선/ 2023-11-13]

성성만(聲聲慢),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 이청조(李淸照, 1084~1155)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쓸쓸하고 쓸쓸할 뿐이라 처량하고 암담하고 걱정스럽구나. 잠깐 따뜻하다 금방 추워지곤 하는 계절 편안한 마음으로 쉴 수가 없네(…) 온 땅에 노란 국화 쌓였는데 지독하게 말랐으니 이젠 누가 따 준단 말인가 창가를 지키고 서서 어두워지는 하늘 어떻게 홀로 마주할까 게다가 오동잎에 내리는 가랑비 황혼이 되어도 방울방울 그치지 않네. 이 광경을 어찌 시름 수(愁) 한 자로 마무리하랴 (류인 옮김) 중국 최고의 여성 시인이라는 이청조가 쓴 송사(宋词: 송나라의 문학 양식). 제목 앞에 붙은 ‘성성만(聲聲慢)’은 곡조 이름인데, 곡조명에 ‘만(慢)’이 붙으면 박자가 느린 곡에 맞추어 쓴 노래(가사)를 의미한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1948∼1991) [동아/ 2023-11-11]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1948∼1991)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행복을 위해서 살면 더 고달프다. 사는 것은 그 자체로도 힘든 일이어서 목표가 너무 높..

낙엽 덮인 산책길 - 김수호 (1940~ )

낙엽 덮인 산책길 - 김수호 (1940~ ) 진 갈색 한 빛깔뿐이면 수채화 화폭이 아니면 바삭바삭 박자 맞춰 주지 않으면 낙엽 덮인 산책길이 얼마나 지루하고 초라할까 노랑부터 주황으로 빨강에서 주홍까지, 거기에 억지로 흔들어 떨어뜨린 푸른 잎이 간간이 섞이며 도는 생기 바가지 쓰고 쌩쌩 달리는 타이어 때묻은 자전거 전용도로에 휩쓸리는 휴지쪽이 무슨 콧노래를 불러내던가 빈 가지 틈새로 손 뻗고 햇빛이 그리는 수채화를 내려보며 어울려 숨쉬노라면 가을의 굽은 어깨 너머 겨울이 찡하게 코끝을 찌른다. (23-11-07)

[유희경의 시:선] 아까운 가을 [문화/ 2023-11-08]

처서 - 임유영 아무도 아무에게도 왜 사냐고 묻지 않았어요 넌 얼마나 가졌니, 나무에게 물으니 가난한 나뭇잎이 쏴아아 요란하게 떠들어댑니다 웃음을 꾹 참으면 안 깨끗한 물이 눈에서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파도의 성분입니다 (임유영 시집 ‘오믈렛’) 아까운 가을 낙엽이 절정이다. 하나둘 떨어져 어느새 한가득한 낙엽을 두고 보다가, 마냥 그럴 수는 없어 빗자루를 들고 나선다. 한참 쓸고 있는데, 지나던 노인 한 분이 “아까우니 그냥 두어요” 하고 말을 건다. 농이겠거니 웃어넘겼는데, 노인이 떠나고 비질을 마친 뒤에도 나는 그 말을 반복해 떠올려보다가 마침내 궁금해지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저 낙엽이 다 돈이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럼 나는 부자일 텐데. 그러나 낙엽은 돈이 아니고, 그러니 많아도 소용이 ..

낙엽 / 유색 동본 - 김수호 (1940~ )

낙엽 / 유색 동본 - 김수호 (1940~ ) 다른 뿌리에서 태어나 다른 나무에서 살다 저마다 맡은 일을 다한 뒤엔 약속이나 한듯이 한 계절에 다 함께 지더니 센바람에 휩쓸리고 뭇발에 짓밟혀도 바삭바삭 할 일이 남은 것처럼 기 꺾이지 않으려고 울긋불긋 성깔도 부리다 끝내 흙으로 되돌아가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몸부림 어느 가지에서 왔건 모두 똑같은 흙색 유색 동본임을 확인하며 (171116)

[최영미의 어떤 시] 새장에 갇힌 새(Caged Bird) -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조선/ 2023-11-06]

새장에 갇힌 새(Caged Bird) -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자유로운 새는 바람을 등지고 날아올라(...) 그의 날개를 주황빛 햇빛 속에 담그고 감히 하늘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한다. (...)좁은 새장에서 뽐내며 걷는 새는 그의 분노의 창살 사이로 내다볼 수 없다. 날개는 잘려지고 발은 묶여 그는 목을 열어 노래한다(...) 겁이 나 떨리는 소리로 잘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그의 노랫소리는 저 먼 언덕에서도 들린다.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에 대해 노래하기 때문이다(...) (강희원 옮김) 김승희 선생님이 엮고 쓴 책 ‘남자들은 모른다’에서 ‘새장에 갇힌 새’를 보자마자 마야 안젤루의 자서전 ‘나는 새장 속의 새가 왜 노래하는지를 안다(I Know Why 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