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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패의 갈림길 - 김수호 (1940~ )

성패의 갈림길 - 김수호 (1940~ ) '넌 꼭 성공할 거야 넌 하나밖에 모르는 외골수 한 번 맘먹으면 끝장을 보니까' 라고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아리송한 말로 배채운다, 그래서 무엇이든 하나는 꼭 이룬다 '넌 못하는 게 없어 넌 다재다능한 팔방미인 하기만 하면 뭐든지 잘 하니까' 라고 보약인지 독약인지 달짜근한 말로 어른다, 그래서 이것저것 시간만 죽인다 (180309)

어느 해 추석 연휴 - 김수호 (1940~ )

어느 해 추석 연휴 - 김수호 (1940~ ) 추석 전날이 주일 성당에서 아침 미사 때 조상의 영원한 안식을 빌고 추석날 아침엔 집에서 아내와 단둘이 가족을 위해 TV 미사를 올렸다 추석날 저녁엔 달 보며 내 소원도 빌어 보려다 미룬다 온 국민의 성화 탓에 달에 얼룩이 짙어질까 봐 추석 다음 날 저녁 보름달도 한숨 돌렸겠지 싶어 올린 기도가 우리 식구의 평안이었다 나라 걱정은 달 너머로 밀리고 (180925)

[유희경의 시:선] 오래 고르는 마음 [문화/ 2023-09-13]

기억의 책 - 김도 저는 읽던 것을 다시 읽어요 돌아서서 걷는다고 왔던 길을 다시 걸어보겠다고 말해야지 한때는 나를 만들어낸 목소리로 알았으나 나를 걷게 하는 목소리였던 목소리를 왜 그렇게 밤이면 펴들고 읽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면 아마도 (김도 시집 ‘핵꿈’) 오래 고르는 마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니야. 소풍의 계절이지. 손님 없는 서점에서 내내 푸념 중이다. 오늘도 매대에 놓인 알록달록한 책들은 참으로 한가롭다. 어서 읽어줄 사람을 찾아가라, 재촉해보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삐뚜름하게 놓인 책들을 바로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서점에서 ‘매대’라 불리는 곳은 일반 책장과는 다르다. 되도록 많은 책을 ‘꽂는 형식’으로 보관하는 곳이 책장이라면, 매대는 되도록 책이 잘 보이게끔 ..

[최영미의 어떤 시] 사랑 5 - 결혼식의 사랑 - 김승희(1952~) [조선/ 2023-09-11]

사랑 5 - 결혼식의 사랑 - 김승희(1952~) 성체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칼을 든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케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흰 장갑을 든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한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이 붙어있으나 실은 섬뜩하고 차가운 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정원’을 다녀온 날 밤에 김승희 시인은 이 시를 썼다. 그날 일본 정원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고 “그 흰 장갑에서 불현듯 차가운 파시즘의 냄새를 맡았다”고 시인은 설명한다.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을 결혼과 식민주의 담론과 연결시켜본 시. 남녀 사이의 힘의 역학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결혼식을 정치적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하늘 바라기 - 이준관(1949∼) [동아/ 2023-09-09]

하늘 바라기 - 이준관(1949∼) 청보리밭 청하늘 종다리 울어대면 어머니는 아지랑이로 장독대 닦아놓고 나는 아지랑이로 마당 쓸어놓고 왠지 모를 그리움에 눈언저리 시큰거려 머언 하늘 바라기 했지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읽다 보면 ‘호모 비아토르’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행하는 인간’이라는 뜻인데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는 설명이다. 인류란 무엇인가를 쫓아가고 이동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여행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코로나 시절에 그렇게 갑갑했던가 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동이라든가 여행은 반드시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도 알지 못하는 대상을 쫓아갈 수 있다. 우리는 희망만으로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 달려 나갈 수 있다. ..

[유희경의 시:선] 초가을 생각 [문화/ 2023-09-06]

가장 위험한 스티로폼을 훔치고 - 이서하 저 멀리 나무 한 그루가 헐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흔드는 것 없이 휘청거려서, 쓰러질 듯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해서, 나보다 나무를 앞에 두고 걸었다 생각하기. 아무 생각하기. 발미를 감추고 생각하기 비할 짝이 없는 생각 (이서하 시집 ‘조금 진전 있음’) 초가을 생각 현관문을 나서면 느닷없이 시원해진 날씨. 계절 사이에도 문이 있는 모양이다. 안과 밖이 문짝 하나 차이이듯 여름과 가을도 하루 차이이지 않을까. 여전히 볕은 뜨겁고 멀리 매미 울음 들리는 것 같고 잎들은 무성하고 푸릇하지만, 구월이 되면 가을. 출근길 버스 안 승객들을 둘러보다가 어제 아침과 다른 점을 발견한다. 그 누구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대신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고 ..

수오지심羞惡之心 - 김수호 (1940~ )

수오지심羞惡之心 - 김수호 (1940~ ) 이 아파트에 이사온지도 12년 그동안 세상 곤두박질에도 아랑곳 없이 이웃 애들은 대밭에 죽순 자라듯 길에서 만나면 몰라보게 어른이 다 되었소 머잖아 얘들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안팎을 누비며 나라 이끌 선봉이 되고 부모를 부양할 터, 천륜이니까요 그러나 애들이 자라 어른이 될 때 부모가 조상의 유산마저 몽땅 써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빚까지 남긴다면 이게 개 돼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표에 미쳐 곶감 빼먹듯 해치우는 정치인들 부끄럼은 아는지 염치는 있는지 영 마음에 안 드오, 벌레 씹은 기분이요 (180521)

[최영미의 어떤 시] 냄새가 오는 길목 - 이진명(李珍明, 1955~ ) [조선/ 2023-09-04]

냄새가 오는 길목 - 이진명(李珍明, 1955~ ) 무엇이든 냄새 맡기 좋았던 길목 다 왔으나 다 오진 않았던 길목에 들어설 때마다 그랬다. 언제고 한 집에서는 길과 맞닿은 부엌 창문으로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를 한 접시 가득 생선 굽는 냄새를 그랬다. 이 나라의 냄새가 아니게 뜨거운 열사(熱砂)의 냄새 퍼뜨려주었다 퇴근길 혼자 가는 자취 생활자의 광막한 공복을 후비곤 했다 (…) 늦여름, 풀이 마른다 이 나라의 냄새가 아니게 풀이 마른다 열사의 타는 물의 향이 넘어온다 쓰라린 가을 길목 냄새가 ‘가는’ 길목이 아니라 ‘오는’ 길목. “다 왔으나 다 오진 않았던”이라는 표현도 절묘하다. 퇴근길에 지친 몸을 끌고 자취방을 향해 골목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 큰길을 지나 골목에 들..

자존감自尊感 - 김수호 (1940~ )

자존감自尊感 - 김수호 (1940~ ) 숨기는 곳을 사람도 다 아는데 도토리를 감추는 다람쥐 그 잎사귀 밑, 나무 구멍 고집하는 건 그래야 다람쥐이기 때문이듯 글자판 없이 휑한 시계가 기계라기보다 시계이고 백사장에 완전 발가벗은 나체족도 짐승이라기보다 사람이듯 이웃이 훤히 눈치채고 있더라도 말못할 사연 보듬고 사는 이 결코 제 입으로 터뜨리지 못하는 건 그래야 사람이기 때문일 터 (17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