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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김수호-창작학습시/김수호♡미발표시 - 2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김수호 (1940~ )

설지선 2023. 8. 15. 08:51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김수호 (1940~ )

 

 

내가 땀 흘려 농사지은 쌀을

나라에서 공출해 가더니

그게 왜놈 군대의 군량미가 되고

빼앗아 간 놋그릇 제기는

전쟁판의 총탄으로 둔갑하고

소나무를 잘라 짜내는 피같은 송진을

전투기의 기름으로 쓰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웃의 큰놈은 병정으로 끌려가

'덴노 헤카 반자이' 외치며 전사했고

건너 마을 딸부자 둘째는

왜놈 군 위안부로 몸 시주 당하고

인기 가수는 왜놈 군가 음반 내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군들 밥 굶고 살 재간 있나요

일본말 쓰며 선생이나 면서기를 하더라도

식솔들 밥은 먹여야지요.

임금이 어벙하여 나라를 잃은 탓에

순박하고 말 잘 듣는 백성들이

졸지에 친일파로 낙인 찍히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 자식도 창씨개명 하고서

조상없는 상것을 만들어 버리다니

북방의 만주나 북간도 

태평양의 하와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던지, 아니면

산골짝에서 백이숙제로 한세상 버릴 걸

나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목숨이라

제 맘대로 끊을 수도 없는데다

시집 장가는 들어가지고

생산한 새끼들을 친일파로 만들다니

모두 어김없이 따라야 하는 게

천륜이 아니던가요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변고

또다시 당한다면

이 늙은이 일생은 빈 깡통

천지신명께 딱 한가지는 맹세하리다

나로써 대를 마감한다고...

넋 나간 나라에 뭘 기대하겠소

백성 깡다구나 헤집을밖에

 

 

(1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