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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의 시:선] 시는 질문이다 [문화/ 2023-06-28]

언덕을 넘는 사람들 - 정영효 확실함을 믿지 않는 곳에서는 가장 현명한 해결책을 질문이라고 부른다 어딘가에 숨어서 이유를 구성하고 있다는 지금은 질문이 필요해 너는 질문을 만나는 게 좋겠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생활을 잃은 이들이 질문을 찾아 언덕을 넘는다 (정영효 시집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 시는 질문이다 내가 운영하는 서점에는 ‘궁리책상’이라는 자리가 있다. 혼자 쓰기에 다소 널찍하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게 없다. 그럼에도 근사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아무래도 시집 가득한 책장에 둘러싸인 시집 서점의 책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한껏 궁리를 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번듯한 한편에 자리하게 두었다. 이 책상 위에는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자루가 놓여 있다. 어떠한 강제도..

백일홍나무 5 - 김수호 (1940~ )

백일홍나무 5 - 김수호 (1940~ ) 자손들 모이는 곳엔 어디나 조상 무덤가로부터 손수 지은 집 담장 옆까지 백일홍나무를 심은 할아버지 귀띔 한마디 없었기에 백일홍나무 심은 뜻에 주려 볼그레한 여름 되면 마른 냇가를 서성거리는 손자 할아버지의 묵언 퀴즈에 애먼 양팔만 비틀던 손자에게 바위틈에서 솟구친 장자莊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땔감으로나 재목으로나 아무 쓸모없는 꼬부랑 나무지만 늙은 손자가 시 쓰듯 정원을 감싸는 노숙한 품위 (190322)

[최영미의 어떤 시] 행복 2 - 나태주(1945~) [조선/ 2023-06-26]

행복 2 - 나태주(1945~)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집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삶의 질은 너무 다르다. 집은 쉬는 곳이다. 쉬어야 인간은 산다. 내 집이 있다면,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도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를 언제 쓰셨을까? ‘행복 1′보다 나중에 썼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행복 1′을 찾아보았다.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는/ 뚱뚱한 아내를 바라볼 때/ 잠시 나는 행복하다/ (…) / 꿈꾸는 듯 귀여운 작은 숙녀/ 딸아이를 바라볼 때/ 나는 잠시 더 행복하다.”(나태주 ‘행복 1′) 지금도 행복을 그..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1973∼ ) [동아/ 2023-06-24]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1973∼ )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공단 지대를 경유해 온 시내버스 천장에서 눈시울빛 전등이 켜지는 저녁이다 손바닥마다 어스름으로 물든 사람들의 고개가 비스듬해지는 저녁이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문득 하나씩의 빈 정류장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내버스 뒤쪽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을 저녁이라고 부른들 죄가 될 리 없는 저녁이다 (하략) 세상이 아프다. 전쟁이 터지고 난민은 떠돈다.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난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인다. 세상을 배워가고 있는 작은..

백일홍나무 4 - 김수호 (1940~ )

백일홍나무 4 - 김수호 (1940~ ) 가시박에 깔린 백일홍 나무 한여름에도 꽃은커녕 제대로 숨도 못 쉬는 것 같더니 그 덮개 걷어 내자 지나친 날을 무르려는 듯 한껏 피워 내는 붉은 꽃송아리가 한 오리 소슬바람에 꺾인 듯 고개 숙이는구나 이웃들은 아직도 단풍잎 치장에 분주한데 임자만 일찌감치 알몸으로 떨고 섰는 건 늦여름 무더위에 너무 무리했던 탓은 아닌지 헉헉대며 꽃만 싸갈긴다 싶더니 가시박 넝쿨 덮치듯이 (171107)

백일홍나무 3 - 김수호 (1940~ )

백일홍나무 3 - 김수호 (1940~ ) 삐르르 종달새의 신호 따라 일제히 끝가지 향해 내닫는 봄꽃 경주에 임자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은 꼬부랑 몰골이 남세스럽기 때문인가 울긋불긋 봄꽃 레이서들은 진즉 내년 기약하며 꽃잔치 한마당을 떠났는걸 장맛비 지나도록 처지다니, 혹시 반 걸음은 되밀리는 흙탕길 탓인가 상기된 얼굴로 트로피 받쳐 들던 챔피언도 색바래기 시간은 못 피하지만 땡볕이 한여름을 태울 즈음 텅빈 스타디움에 홀로 기어들다니 숨 돌리며 추억 쌓기도 잠시, 이내 소슬바람 호각에 꽃잎 털며 돌아서는 뒷모습 신선인들 어찌 박수를 아꼈을꼬 자신과 싸워 세상 넘은 노장의 투혼이여 (110802)

[유희경의 시:선] 기다리는 희망 [문화/ 2023-06-21]

앙망 - 백은선 희망과 함께 오후의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신다 어젯밤에 나 꿈을 꿨어 차가운 계단에 앉아 내내 기다리는 꿈 희망은 말한다 나는 머그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본다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인다 (백은선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기다리는 희망 서점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참이다. 옆 가게 커피숍 사장님과 마주쳤다. 목례하고 지나치려는데, 나를 부른다. “요즘 서점은 좀 어때요.”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인사치레인지 진지한 질문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는데, 그것은 진심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리숙할 정도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불현듯 시작된 어려움이 느닷없이 끝날 리 없다는 것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던 ..

너마저 - 김수호 (1940~ )

너마저 - 김수호 (1940~ ) 깔끔한 여생 지내기에 모두 닫고 귀만 열면 좋으리 내 생각이 너무 가벼웠나 시정잡소리 피한다고 귓속 외길에 노래만 몰아쳐 과부하가 걸린 탓인가 믿었던 귀가 돌아앉으니 마음속 주름을 펴주며 가슴을 도닥거리는 노년의 벗 유행가 트로트가 슬며시 자리를 뜨는구나 아직 사용가도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하다 안개 속으로 글자가, 너마저 (171128)

운명을 부른 이름 - 김수호 (1940~ )

운명을 부른 이름 - 김수호 (1940~ ) 내 이름은 빨리 부르면 수호가 수오로 다시 소가 된다 선생님은 '김소, 김소' 친구들은 '소야, 소야' 후배들은 수호 형이라고 높여서 '소영, 소영' 하고 불렀다 한 후배가 소개한 여학생이 내게 되물었다 '이름이 소영이세요?' 거의 날 '소'라고 부르는 걸 사람으로 들었다니 싫지 않았다 젊은 날, '황소'에 뽑힌 게 운명을 부른 이름 때문일까 (19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