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2-2 김수호-조선가슴시 153

[최영미의 어떤 시] 루바이(Rubái) 71 - 오마르 하이얌 [조선/ 2021.06.07]

[최영미의 어떤 시] 루바이(Rubái) 71 - 오마르 하이얌 [조선/ 2021.06.07] 루바이(Rubái) 71 움직이는 손가락은 쓴다, 썼다. 네 아무리 기도를 바치고 재주를 부린들, 되돌아 한 줄도 지울 수 없지. 눈물 흘린들 한 단어도 씻어낼 수 없지 루바이 96 아, 장미꽃 시들며 봄날은 사라지고 젊음의 향기 짙은 책장도 닫혀야하네 나뭇가지 위에서 노래하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날아갔는지! - 오마르 하이얌(Omar Khayyám 1048∼1131)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Rubái·페르시아어로 4행시)를 어떻게 해설할지, 손가락이 떨린다. 루바이 71번은 쓰는 행위 자체를 소재로 삼은 특이한 시다. 한번 쓴 뒤에 지울 수 없는 글, 한번 지나가면 지울 수 없는 인생. 눈물을 흘..

[최영미의 어떤 시] 소네트 66 - 윌리엄 셰익스피어 [조선/ 2021.05.31]

[최영미의 어떤 시] 소네트 66 - 윌리엄 셰익스피어 [조선/ 2021.05.31] 소네트 66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이 모든 것에 지쳐 휴식 같은 죽음을 원하니, 가치 있는 사람이 가난하게 태어난 걸 보고 (…) 황금빛 명예는 부끄럽게도 잘못 주어지고 순진한 처녀는 함부로 매춘에 내몰리고 올바른 완성은 부당하게 망신당하고 힘은 모자란 것의 방해를 받아 불구가 되고 예술은 권력에 혀가 묶였고 (…) 이 모든 것에 지쳐, 세상을 떠나고 싶어 죽는 것이 내 사랑을 홀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면 (※원문과 행을 다르게 배열했음) 불공정을 비판한 소네트(sonnet: 14줄의 운을 맞춘 시). 셰익스피어도 부당하게 망신당하고 그의 예술도 평이한 작품이라는 오해를 받았다니. 세..

[최영미의 어떤 시] 참으로 아름다운 오월 -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조선/ 2021.05.23]

[최영미의 어떤 시] 참으로 아름다운 오월 -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조선/ 2021.05.23] 참으로 아름다운 오월 -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참으로 아름다운 오월, 모든 꽃봉오리 피어날 때, 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텄네. 참으로 아름다운 오월, 모든 새들이 노래 부를 때, 나의 그리움과 아쉬움 그녀에게 고백했네. (김광규 옮김) 나의 학창 시절 일기장 겸 시화집에 적힌 시를 꺼내어 다시 본다. 고등학생인 내가 어디서 옮겼는지 모르는 하이네의 ‘5월’은 “온갖 꽃이 싹트는 아름다운 5월에 수줍게 피어난 마음속의 이 사랑”이다. 김광규 선생님의 번역이 더 정확한 것 같으나, 나는 수줍은 여고생의 마음에 피어났던 “온갖 꽃이 싹트는 아름다운 5월”을 붙잡고 ..

[최영미의 어떤 시] 혼자 웃다 (獨笑)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조선/ 2021.05.17]

[최영미의 어떤 시] 혼자 웃다 (獨笑)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조선/ 2021.05.17] 혼자 웃다 (獨笑)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양식이 있으면 먹어줄 자식 없고 아들이 많으면 주릴까 근심하네 높은 벼슬 한 사람 어리석기 마련이고 재주 있는 사람은 그 재주 펼 데 없네 한 집안엔 완전한 복 드문 법이고 지극한 도(道) 언제나 무너져 버리네 애비가 검소하면 자식이 방탕하고 아내가 영리하면 남편이 어리석네 달이 차면 구름을 자주 만나고 꽃이 피면 바람이 불어 날리네 사람 없음을 홀로 웃노라 (송재소 옮김) 1804년 7월 유배지 강진에서 쓴 시라는데, 창작된 때와 장소를 안다는 게 놀랍다. (내가 죽은 뒤 ‘공항철도’가 언제 쓰였는지 사람들이 알까?) 자신을 총애한 정..

[최영미의 어떤 시] 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1948∼1991) [조선/ 2021.05.10]

[최영미의 어떤 시] 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1948∼1991) [조선/ 2021.05.10] 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1948∼1991)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萬古) 만건곤(滿乾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딸 이..

[최영미의 어떤 시] 이브의 딸(A Daughter Of Eve) -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조선/ 2021.05.03]

[최영미의 어떤 시] 이브의 딸(A Daughter Of Eve) -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조선/ 2021.05.03] 이브의 딸 -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한낮에 잠들어, 으스스한 밤에 쓸쓸하고 차가운 달빛 아래 깨어난 나는 바보였네. 내 장미를 너무 일찍 꺾어버린, 내 백합을 덥석 부러뜨린 바보. 내 작은 정원을 지키지 못했네 시들어 완전히 버려지고서야, 한번도 울어본 적 없는 듯 우네 오 잠들었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깨어나 보니 겨울이네. 미래의 봄과 햇살 따사로운 즐거운 내일을 얘기한들 뭣하리- 희망이며 이것저것 다 사라져, 웃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나 홀로 앉아있네. 이보다 슬픈 시를 본 적이 없다. ‘이브의 딸’ 제목부터 기막히다. 자신을 가두..

[최영미의 어떤 시] 기억하는가 - 최승자 (崔勝子 1952∼) [조선/ 2021.04.26]

[최영미의 어떤 시] 기억하는가 - 최승자 (崔勝子 1952∼) [조선/ 2021.04.26] 기억하는가 - 최승자 (崔勝子 1952∼)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는 처참하게 부서진 가슴에서 나온다. “환희처럼 슬픔처럼”이라고 최승자 시인이 썼듯이 사랑의 환희 속에 이별의 예감 혹은 두려움이 1g은 들어있지 않나? 최승자의 어떤 시는 내게 충격이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개 같은 가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찌기 나는’) 여자 냄새가 나지 않는, 여성스러움을..

[최영미 어떤 시] 사랑 -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조선/ 2021.04.19]

[최영미 어떤 시] 사랑 -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조선/ 2021.04.19] 사랑 -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 시인의 대표작 ‘풀’ ‘푸른 하늘을’보다 나는 이 작은 소품에 더 끌린다. 전통적인 운율이 있어 소리 내 읽으면 흥이 나고 간결한 시어들이 피라미드 쌓듯 포개져 점점 감정이 고조되다 마지막에 번개처럼 갈라지며 독자의 가슴을 찢는 ‘금이 간 얼굴’. 어둠, 불빛 그리고 얼굴과 번개의 이미지만으로 만든 연애시. 김수영이 쓴 200여편의 시 중 제목에 사랑이 붙은 시는..

[최영미의 어떤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1930∼1969) [조선/ 2021.04.12]

[최영미의 어떤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申東曄·1930∼1969) [조선/ 2021.04.12]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申東曄·1930∼1969)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인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중략)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후략)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4월이면 생각나는 신동엽. 4월 혁명을 온몸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증언했던 시인. 먹구름..

[최영미의 어떤 시] 독을 품은 나무 - 윌리엄 블레이크 (1757-1827) [조선/ 2021.04.05]

[최영미의 어떤 시] 독을 품은 나무 - 윌리엄 블레이크 (1757-1827) [조선/ 2021.04.05] 독을 품은 나무 - 윌리엄 블레이크 (1757-1827) 나는 내 친구에게 화가 났어; 친구에게 분노를 말했더니 분노가 사라졌지. 나는 나의 적에게 화가 났지만; 말하지 못해 분노가 자라났지. 그래서 무서워 나의 분노에 물을 주었지 밤에도 낮에도 눈물을 뿌렸지 그리곤 웃으며 분노의 나무를 햇볕에 말렸어 부드럽게 적을 속이는 함정이었지. 낮에도 밤에도 (분노의) 나무가 자라서 밝은 사과 한 알이 맺혔어. 나의 적이 빛나는 사과를 보더니, 그게 내 것임을 알아차렸지 뭐야. 밤의 장막이 드리워졌을 때, 그는 내 정원에 몰래 들어왔지; 다음 날 아침, 나무 아래 뻗어있는 나의 적을 발견하곤 아주 기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