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1948∼1991) [조선/ 2021.05.10]
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1948∼1991)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히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萬古) 만건곤(滿乾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딸 이름을 기억도 못 하는 어머니를 엊그제 요양 병원에서 유리벽 너머로 면회하고 돌아와 고정희의 시를 읽는다. 처음에는 심심하게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쾅! 내려치는 시. 어머니에 대한 시는 먼 옛날부터 있었지만 여성 시각에서 어머니를 노래한 시는 많지 않다. 흔한 주제의 시일수록 쓰기 어렵다. 새로운 게 나올 건더기가 적기 때문이다. 주제에 대한 압박을 느낄수록 새롭고 신선한 표현이 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고정희 선생님의 ‘어머니’가 나는 더 놀라웠다.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가 하느님을 낳았다. 들어라 만고(萬古·아주 먼 옛날) 만건곤(滿乾坤·하늘과 땅에 가득한) 남자들아. 예수와 부처와 마호메트, 그 위대한 하느님들을 낳은 이는 여자였다는 이 자명한 사실. 대놓고 페미니즘을 외치진 않지만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는 여성 해방 신학의 백 마디 도그마보다 강렬하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여성신문' 초대 주간을 지낸 고정희는 지리산에서 실족사했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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