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혼자 웃다 (獨笑)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조선/ 2021.05.17]
혼자 웃다 (獨笑) - 정약용 (丁若鏞 1762∼1836)
양식이 있으면 먹어줄 자식 없고
아들이 많으면 주릴까 근심하네
높은 벼슬 한 사람 어리석기 마련이고
재주 있는 사람은 그 재주 펼 데 없네
한 집안엔 완전한 복 드문 법이고
지극한 도(道) 언제나 무너져 버리네
애비가 검소하면 자식이 방탕하고
아내가 영리하면 남편이 어리석네
달이 차면 구름을 자주 만나고
꽃이 피면 바람이 불어 날리네
든 사물 이치가 이와 같은데
사람 없음을 홀로 웃노라
(송재소 옮김)
1804년 7월 유배지 강진에서 쓴 시라는데, 창작된 때와 장소를 안다는 게 놀랍다. (내가 죽은 뒤 ‘공항철도’가 언제 쓰였는지 사람들이 알까?) 자신을 총애한 정조가 죽은 뒤 마흔세 살 팔팔한 학자의 절망이 4행의 “펼 데 없네”에 숨어있다.
6행의 원문은 ‘至道常陵遲’인데 ‘至道’가 뭘 의미하는지? 개인이 추구하는 도리 혹은 최선을 추구하는 정책? ‘능지(陵遲)’는 구릉이 세월이 지나며 평평해진다는 뜻. 한때 최선이었던 길, 지극한 사상도 시간이 지나면 쇠퇴한다.
사회와 인생의 모순을 정확하게 묘사한 다산의 시와 산문, 그 치열한 사실주의를 나는 사랑한다. 오백 권에 이르는 그의 저술 중에 살아남은 건, 시와 산문뿐이지 않은가. 목민심서 등 사상서들이 당대에 활용되었는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조선이 망하지 않았겠지. 실사구시적으로 말해, 현실에 적용되지 못하는 사상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리 훌륭한 논리도 시간이 지나면 썩고, 푸른 것은 오월의 나무뿐인걸.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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