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2-2 김수호-조선가슴시 153

[최영미의 어떤 시] 참고문헌 없음 - 이성미 (1967∼ ) [조선/ 2021.03.29]

[최영미의 어떤 시] 참고문헌 없음 - 이성미 (1967∼ ) [조선/ 2021.03.29] 참고문헌 없음 - 이성미(1967~ ) 거리, 소리 내어 말하면 회색 길이 나타난다 (중략) 거리, 라고 다시 말하면, 사람이 서 있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본다.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좁혀지는 거리, 나는 위협을 느끼고 거리 밖으로 달려 나간다. (중략) 지워진 입이고, 처음 생겨난 입이고, 더듬거리는 입이고, 소리치는 입이고, 지금은 독백을 중얼거리는 입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중략) 발화 이후 저 문장은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구에게 닿는 것이지. 공기 속으로 흩어지나. 햇빛에 증발할 건가. 다시 내 몸속으로 들어와야 하나. 저 문장은 어딘가로 가서 완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저 문장을 들은..

[최영미의 어떤 시] 바다와 나비 - 김기림(金起林·1908~?) [조선/ 2021.03.22]

[최영미의 어떤 시] 바다와 나비 - 김기림(金起林·1908~?) [조선/ 2021.03.22] 바다와 나비 - 김기림(金起林·1908~?)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나비의 허리에 걸린 “새파란 초생달”이 산수화 한 폭 같다. 선명한 이미지, 절제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김기림이 일제강점기에 이처럼 우리말의 맛을 잘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시를 썼다. 처음 읽을 때는 귀엽고 앙증맞고 서글픈 공주의 시였다. “공주처럼 지쳐서”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철없이 나대..

[최영미의 어떤 시]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1933) [조선/ 2021.03.15]

[최영미의 어떤 시]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1933) [조선/2021.03.15]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1933)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은 없고 결코 성내지 아니하며 언제나 조용히 웃고 있어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약간의 야채를 먹으며 모든 것을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며 그리고 잊지 않으며 들녘 솔밭 그늘의 조그마한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면서 동쪽에 병든 아이가 아프면 가서 병구완 해주고 서쪽에 지쳐버린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겁내지 말라고 일러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송사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

[최영미의 어떤 시] 3월에게(Dear March) -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 [조선/ 2021.03.07]

[최영미의 어떤 시] 3월에게(Dear March) -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 [조선/ 2021.03.07] 3월에게(Dear March) -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 3월아, 어서 들어와! 널 보니 얼마나 기쁜지! 전부터 너를 찾았었지 모자는 여기 내려 놔-(중략) 오, 3월아, 나랑 어서 2층으로 올라가자 너한테 할 말이 아주 많아! (중략) 누가 문을 두드리니? 어머 4월이잖아! 어서 문을 닫아! 나는 쫓기지 않을 거야! 일년 동안 밖에 나가 있던 사람이 내가 널 맞이하느라 바쁠 때 날 부르네 하지만 네가 오자마자, 하찮은 것들은 정말 하찮아 보여 비난도 칭찬만큼이나 소중하고 칭찬도 비난처럼 대수롭지 않지. 3월처럼 발랄한..

[최영미의 어떤 시] 안녕 내 사랑(Bella Ciao) [조선/ 2021.03.01]

[최영미의 어떤 시] 안녕 내 사랑(Bella Ciao) [조선/ 2021.03.01] 안녕 내 사랑 (Bella Ciao)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오,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아침에 일어나 침략자들을 보았지. 오 파르티잔이여 나를 데려가 주오. 나는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어. 내가 파르티잔으로 죽으면 그대 나를 묻어주오. 나를 산에 묻어주오. 아름다운 꽃그늘 아래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가며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하겠지. 파르티잔의 꽃이라고, 자유를 위해 죽은 파르티잔의 꽃이라고 (※반복되는 구절은 생략) 이탈리아에 코로나 봉쇄령이 내려진 작년 3월, 동영상으로 벨라 차오를 처음 들었다. 하루에 수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는 비상시국에 집집마다 발코니에 나와 손뼉 치며 따라 부르던 노래. 독일인들..

[최영미의 어떤 시] 다시 부르는 옛 노래 - 예이츠(W. B. Yeats·1865∼1939) [조선/ 2021.02.22]

[최영미의 어떤 시] 다시 부르는 옛 노래 - 예이츠(W. B. Yeats·1865∼1939) [조선/ 2021.02.22] 다시 부르는 옛 노래 - 예이츠(W. B. Yeats·1865∼1939) 버드나무 정원 아래 내 사랑과 만났네 그녀는 작고 눈처럼 하얀 발로 수양버들 정원을 지나갔지 그녀는 내게 나무에 잎사귀가 자라듯 쉽게 사랑하라고 말했지 그러나 나는 어리고 어리석어 그녀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네 강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 서있었네 내 기울어진 어깨 위에 그녀는 눈처럼 흰 손을 얹었지 그녀는 내게 강둑 위에 풀이 자라듯이 인생을 쉽게 살라고 말했지 그러나 나, 젊고 어리석었고 그래서 지금 눈물로 가득하네 어느 노파가 부르던 3행의 민요를 예이츠가 늘려 시로 만들었다. 예이츠에게 사랑은 쉽지 않았..

[최영미의 어떤 시] 유언(遺言) - 김명순(金明淳·1896∼1951) [조선/ 2021.02.15]

[최영미의 어떤 시] 유언(遺言) - 김명순(金明淳·1896∼1951) [조선/ 2021.02.15] 유언 (遺言) - 김명순(金明淳·1896∼1951)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이보다 장렬한 유언이 있을까. 네가(조선이) 나를 영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영결할 때”이다. 그만큼 주체적이고 활달한 자아를 엿볼 수 있다. 죽은 시체에게도 학대해 달라니. 자학적인 표현에서 그녀에 대한 집단 가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된다. 평양 갑부 소실의 딸로 태어난 김명순..

[최영미의 어떤 시] 곧은 길 가려거든 - 최치원 (崔致遠·857∼?) [조선/ 2021.02.08]

[최영미의 어떤 시] 곧은 길 가려거든 - 최치원 (崔致遠·857∼?) [조선/ 2021.02.08] 곧은 길 가려거든 - 최치원 (崔致遠·857∼?) 어려운 때 정좌(正坐)한 채 장부 못 됨을 한탄하나니 나쁜 세상 만난 걸 어찌하겠소. 모두들 봄 꾀꼬리의 고운 소리만 사랑하고 가을 매 거친 영혼은 싫어들 하오. 세파 속을 헤매면 웃음거리 될 뿐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 장한 뜻 세운들 얻다 말하고 세상 사람 상대해서 무엇 하겠소. (김수영 옮김) 어려서 당나라로 유학 갔던 최치원이 25세에 쓴 시. 낯선 땅에서 얼마나 요지경 험한 꼴을 봤으면 이런 시가 나왔을까. “봄 꾀꼬리”와 “가을 매”의 대비가 절묘하다. 스물다섯 살이면 한창 봄인데, 그대는 어이해 가을 매의 서러운 노래 부르나. “..

[최영미의 어떤 시] 아이들을 곡하다[哭子] - 허난설헌 (許蘭雪軒·1563∼1589) [조선/ 2021-02-01]

[최영미의 어떤 시] 아이들을 곡하다[哭子] - 허난설헌 (許蘭雪軒·1563∼1589) [조선/ 2021-02-01] 아이들을 곡하다[哭子] - 허난설헌 (許蘭雪軒·1563∼1589)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 땅 무덤 한 쌍이 마주보며 솟았네. 쏴쏴 바람은 백양나무에 불고 도깨비불은 무덤에서 반짝인다. 지전(紙錢)을 살라 너희 혼을 부르고 술을 따라 너희 무덤에 붓는다. 나는 아네. 너희 형제의 혼이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을 줄. 배 속에 아이가 있다만 어찌 자라기를 바라랴? 부질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운다. (강혜선 옮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생생하게 표현한 5언고시.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던 사대부 집안의 여인은 ..

[최영미의 어떤 시] 낙타 - 신경림(1935~ ) [조선/ 2021-01-25]

[최영미의 어떤 시] 낙타 - 신경림(1935~ ) [조선/ 2021-01-25] 낙타 - 신경림 (1935- )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절창이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시. 처음 잡지에 실린 ‘낙타'를 읽을 때 마흔 무렵의 나는 “모래만 보고 살다가”에 꽂혔다. 보지 않는 듯하면서 다 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