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유언(遺言) - 김명순(金明淳·1896∼1951) [조선/ 2021.02.15]
유언 (遺言) - 김명순(金明淳·1896∼1951)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이보다 장렬한 유언이 있을까. 네가(조선이) 나를 영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영결할 때”이다. 그만큼 주체적이고 활달한 자아를 엿볼 수 있다. 죽은 시체에게도 학대해 달라니. 자학적인 표현에서 그녀에 대한 집단 가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된다.
평양 갑부 소실의 딸로 태어난 김명순은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공부하다 1917년 최남선이 주간하는 ‘청춘'의 현상 응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창조' 동인으로 시와 소설을 발표했는데, 일본 유학 중에 고향 선배에게 데이트 강간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심한 비난에 시달렸다.
“부정한 혈액” “처녀 때 강제로 남성에게 정벌받았다”는 남성 문인들의 모욕에도 굴하지 않고 김명순은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간행했고 매일신보사의 기자로도 일했다. 최초의 여성 소설가. 근대 처음으로 시집을 간행한 여성 시인. 그 찬란한 처음을 연 그의 마지막은 불우했다. 궁핍한 생활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땅콩을 팔다 도쿄의 뇌병원에서 죽었다고.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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