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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 153

[최영미의 어떤 시] 길가메시 서사시 [조선/ 2021-12-27]

[최영미의 어떤 시] 길가메시 서사시 [조선/ 2021-12-27] 길가메시 서사시 네 배를 채워라, 즐겨라 낮에도 밤에도!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라 춤추고 놀아라 낮에도 밤에도! 물에 들어가 목욕하고, 네 머리를 씻고 깨끗한 옷을 입어라 네 손을 잡은 아이를 바라보고, 네 아내를 안고 또 안아 즐겁게 해줘라 인류의 오래된 이야기,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의 한 장면이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 헤매는 길가메시에게 선술집 주인 시두리는 말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인간에게 죽음을 주었다…그러니 배불리 먹고 즐겨라” 그 단순함에 나는 매료되었다. 먹고 씻고 사랑하라! ‘carpe diem’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허무를 바탕으로 한 현세주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특징이다. 중년을 지나 나는..

[최영미의 어떤 시]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 나혜석(羅蕙錫·1896∼1948) [조선/ 2021.12.20]

[최영미의 어떤 시]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 나혜석(羅蕙錫·1896∼1948) [조선/ 2021.12.20]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 나혜석(羅蕙錫·1896∼1948)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처음부터 격하게 시작하는, 나혜석의 유언과도 같..

[최영미의 어떤 시] 술 노래 (A Drinking Song) - 예이츠 (W. B. Yeats·1865~1939) [조선/ 2021-12-13]

[최영미의 어떤 시] 술 노래 (A Drinking Song) - 예이츠 (W. B. Yeats·1865~1939) [조선/ 2021-12-13] /일러스트=김성규 술 노래 (A Drinking Song) - 예이츠 (W. B. Yeats·1865~1939)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우리 늙어 죽을 때까지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들어 내 입술로 가져가며 그대를 바라보고, 나 한숨짓노라. 젊은 날, 술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소리 내어 암송했던 예이츠의 술 노래. 영어가 쉬워 외우려 애쓸 것도 없다. “입으로 at the mouth” “눈으로 in the eye” 전치사구로 끝나는 1행과 2행이 대구를 이루고 “comes in”이 반복되어 노래가 되었다. 마지막 행에 나오는 ‘..

[최영미의 어떤 시] 행복 - 허영자 (許英子·1938~) [조선/ 2021.12.06]

[최영미의 어떤 시] 행복 - 허영자 (許英子·1938~) [조선/ 2021.12.06] /일러스트=김성규 행복 - 허영자 (許英子·1938~)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 거야 아이들이 보물 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무 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정말 어딘가에 그게 있을까? 왜 내 눈엔 안 보이는 거지?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 지금도 있을까. 중년을 지나 깜짝 놀랄 일은 누가 다쳤다든가 누가 암에 걸렸다든가 하는 슬픈 일이었다. 놀랍지도 신바람 나지도 슬프지도 않은 하루를 보내고 허영자 선생님의 ‘행복’을 읽었다. 친구를 앞에 두고 말하는 듯 구어체의 “눈..

[최영미의 어떤 시] 본보기 (The Example) - 윌리엄 데이비스 (W. H. Davies·1871∼1940) [조선/ 2021.11.29]

[최영미의 어떤 시] 본보기 (The Example) - 윌리엄 데이비스 (W. H. Davies·1871∼1940) [조선/ 2021.11.29] 본보기 (The Example) - 윌리엄 데이비스 (W. H. Davies·1871∼1940) 여기 나비가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가 있다; 거칠고 단단한 바위 위에 행복하게 누운, 달콤하지 않은 돌덩이 위에 친구도 없이 저 혼자 행복한 나비. 이제 내 침대가 딱딱하더라도 아무 걱정 하지 않을 거야; 작은 나비처럼 나는 나의 즐거움을 만들어야지. 그 행복한 마음이 바위도 꽃으로 만드는 힘을 가진 한 마리 작은 나비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이 시를 생각해야겠다. 영어로 읽으면 간단명료하게 머리에 쏙 들어오는데 우리말로 옮기자니 어렵다. “여기 거칠고 단단한..

[최영미의 어떤 시] 겨울 파리[寒蠅]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2021-11-22]

[최영미의 어떤 시] 겨울 파리[寒蠅]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2021-11-22] 겨울 파리[寒蠅]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겨울 파리 벽 위에 딱 붙어 날개 접고 마른 송장 되었네 소란만 일으켜 미움받아 앵앵대고 성가셔도 못 잡았던 찬바람에 다 죽었나 했더니 따뜻한 방에서 다시 날아올라 더 이상 살아나지 말라며 가시나무 손에 쥐고 혼쭐 냈지 더위엔 호기롭고 장하더니만 찬 서리에 풀 죽어 설설 긴다네 단청 기둥에 점 하나 되고 흰 벽 위 까만 사마귀 점 되어 쓸모없는 얇은 날개로 모퉁이에 천한 흔적 하나 남겼거늘 때 얻었다 방자하지 마라 권세 다한 뒤 그 누구를 원망하랴 (최명자 옮김) 재치와 위트가 넘치는 오언절구 한시. 2행에서 날개를 접고 벽에 붙은 파리를 마른..

[최영미의 어떤 시] 가을밤 - 조용미(曺容美·1962∼) [조선/ 2021.11.14]

[최영미의 어떤 시] 가을밤 - 조용미(曺容美·1962∼) [조선/ 2021.11.14] 가을밤 - 조용미(曺容美·1962∼)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했다) 조용하게 휘젓는 시다. 자신을 위해,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 놓았다가 깜박..

[최영미의 어떤 시] 추억(Remembrance) - 바이런(George G Byron·1788∼1824) [조선/ 2021.11.08]

[최영미의 어떤 시] 추억(Remembrance) - 바이런(George G Byron·1788∼1824) [조선/ 2021.11.08] 추억(Remembrance) - 바이런(George G Byron·1788∼1824) 모든 것은 끝났다! -꿈이 알려준 대로; 미래는 희망에 빛나기를 그만두었고 내 생애 행복한 날들은 얼마 되지 않네 불행의 차가운 바람에 얼어붙어 내 삶의 새벽은 흐려졌구나. 사랑이여 희망이여 기쁨이여 모두 안녕! 추억에도 작별을 고할 수 있을까! 가을은 추억의 계절인가? 봄이 더 감질나게 추억을 환기시키지 않던가? 찬 바람 부는 11월에 읽으니 ‘불행의 찬 바람’이 더 실감 난다. 내 생의 새벽에, 여고 1학년 시절에 만든 시화집에 실려 있는 시를 다시 꺼내 음미했다. 행복할 날들은 ..

[최영미의 어떤 시] 뺄셈 - 김광규(金光圭·1941∼) [조선/ 2021-11-01]

[최영미의 어떤 시] 뺄셈 - 김광규(金光圭·1941∼) [조선/ 2021-11-01] 뺄셈 - 김광규(金光圭·1941∼) 덧셈은 끝났다 밥과 잠을 줄이고 뺄셈을 시작해야 한다 남은 것이라곤 때묻은 문패와 해어진 옷가지 이것이 나의 모든 재산일까 돋보기 안경을 코에 걸치고 아직도 옛날 서류를 뒤적거리고 낡은 사진을 들추어보는 것은 품위 없는 짓 찾았다가 잃어버리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 또한 부질없는 일 이제는 정물처럼 창가에 앉아 바깥의 저녁을 바라보면서 뺄셈을 한다 혹시 모자라지 않을까 그래도 무엇인가 남을까 김광규 선생의 시선집에 집에 관한 시들이 많다. 서울로 이사한 직후에 읽어 그런지 ‘뺄셈’이나 ‘고향’ 같은 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절창은 4·19 세대의 내면 풍경을 노래한 ‘희미한 옛사랑..

[최영미의 어떤 시] 피 -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 のり子 1926-2006) [조선/ 2021.10.25]

[최영미의 어떤 시] 피 -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 のり子 1926-2006) [조선/ 2021.10.25] / 일러스트=김성규 피 -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 のり子 1926-2006) 이라크의 가수가 노래 불렀다 열렬히 허리를 비틀어 가며 “사담에게 이 피를 바치자 사담에게 이 생명을 바치리” 어딘지 귀에 익은 노래 45년 전 우리도 불렀다 독일 어린이들도 불렀다 지도자의 이름을 걸고 피를 바치자 따위의 노래를 부를 땐 변변한 일은 없는 법 피는 온전히 자신을 위해 써야 하는 것 굳이 바치고 싶다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야말로 (성혜경 옮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쓸 피가 내게 남아 있나? ‘변변한’이라는 형용사가 절묘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가 생각났다. “과거에 종교나 사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