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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 시] 너에게 - 유치환 (1908~1967) [조선/ 2023-10-09]

너에게 - 유치환 (柳致環 1908~1967)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생뚱맞아 한참 노려보았다. 푸른 아침도 푸른 저녁도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희뿌연 도시의 아침과 저녁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마포의 어느 도서관에서 ‘너에게’를 읽었다. ‘좋은 이웃’에 공감하며 나의 행운을 저울질해 보았다. 살아갈수록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아파트 천장 누수로 위 아래층과 갈등을 겪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한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백운산 업고 가을 오다 - 신용목(1974∼) [동아/ 2023-10-07]

백운산 업고 가을 오다 - 신용목(1974∼) 타는 가을 산, 백운 계곡 가는 여울의 찬 목소리 야트막한 중턱에 앉아 소 이루다 추분 벗듯 고요한 소에 낙엽 한 장 떠 지금, 파르르르 물 어깨 떨린다 물속으로 떨어진 하늘 한 귀가 붉은 잎을 구름 위로 띄운다 마음이 삭아 바람 더는 산 오르지 못한다 하루가 너무 높다 맑은 숨 고여 저 물, 오래전에 승천하고 싶었으나 아직 세상에 경사가 남아 백운산 흰 이마를 짚고 파르르르 떨림 이 시를 쓴 신용목은 가을이나 바람처럼 쓸쓸한 것들을 잘 다루는 시인이다. 사실 ‘다룬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시라는 붓끝으로 그려낸다고 말해야 옳다. 눈앞의 사물을 정밀히 그리는 것이 극사실주의이고, 이런 경향이 그림에서도 지나간 사조가 된 것처럼 시에서도..

강물과 함께 흐르고 싶건만 - 김수호 (1940~ )

강물과 함께 흐르고 싶건만 - 김수호 (1940~ ) 세월아! 너만 혼자 흐를 수는 없겠냐 수평선에 낙조가 제아무리 미색일망정 서둘러 봐야 못 돌아설 심해에 어찌 막장 떨이로 제 명을 던지겠냐 굽이굽이 돌면서 보洑도 만들어 사람뿐이랴, 뭍이나 물속 생명한테도 쉼터를 마련해 주는 선한 일에 미력이나마 살짝 보태고 싶었는데 끌려 가지 않으려 바둥댄 몸부림에 한참 지체된 깨달음이라니 헛되이 낭비한 땀방울, 그 얼룩이나마 이웃과 나누는 게 도리인 것을 잠시 잠깐 숨을 돌려 쉬면서 가끔은 강물과 함께 흐르고 싶건만 왜 내 허리춤을 부여잡고 있냐 너만 앞설 수는 없겠냐, 세월아! (170726)

[유희경의 시:선] 이 가을의 무늬 [문화/ 2023-10-04]

이 가을의 무늬 - 허수경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허수경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 가을의 무늬 빗소리 듣는다. 가만 곰곰해지는데 나는, 무슨 생각이 이리 깊은 것이냐. 덥다와 춥다 사이. 휘둘리지 않고 온몸의 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이구나 가을은. 창문을 좀 더 열어둔다. 셀 수도 따질 수도 없는 많은 것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다. 지금 나는 가을을 ‘타는’ 모양이다. 사전을 열어 ‘타다’를 검색해본다. 아홉 갈래의 의미가 있구나. 하나하나 대입해본다. 불꽃이 일어 ‘타는’ 것도 말이 된다. 마른 마..

무슨 민족끼리 씩이나 - (1940~ )

무슨 민족끼리 씩이나 - 김수호 (1940~ ) 한민족의 본거지 한반도 현재 휴전선 이북은 한민족을 지배하는 핵심이 태양족 광복 후 70여 년 족히 3대를 이어가고 있는 그 김씨왕조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무슨 민족끼리 씩이나 그들도 한민족이었지만, 이젠 역사도 언어도 전통과 문화도 태양신의 입맛대로 뜯어 고치고 이념, 체제, 사상, 가치가 서로 다르게 이민족화한 원흉인 주제에 우리 민족끼리 수작을 부리다니 피부색과 언어가 같다? 그럼 우리 게르만민족끼리 우리 유대민족끼리 우리 앵글로-색슨민족끼리 우리 라틴민족끼리... 세상이 몽땅 헤쳐 모여야 한다는 거냐 색 바랜 종족주의를 흔들며 무슨 민족끼리 씩이나 이웃이 싫으면 안 보면 그만 정녕 한 지붕 아래 식구는 내몰라라 할 수야 없다 한들,..

룡龍이와 랑郞이네 이야기 - 김수호 (1940~ )

룡龍이와 랑郞이네 이야기 - 김수호 (1940~ ) 룡이와 랑이는 사촌지간이요 그러니까 아버지끼리는 친형제지요 룡이의 아버지가 형이고 두 형제 아래로 룡이 보다 기껏 5살 많은 늦둥이 막내 삼촌이 있소 룡이와 랑이는 같은 중학교 동급생으로 쌍둥이처럼 늘 붙어다녔소 룡이와 랑이의 할아버지가 돌발 사고로 세상 뜨자 할머니는 그 충격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소 그 와중에도 노친네 걱정은 오로지 늦둥이 막내 삼촌뿐이었소 할머니는 장남인 룡이 아비에게 막내의 학업과 취직 등을 돌봐주는 조건으로 막내 몫의 땅을 주었소. 그러나 위함 받으며 자란 큰아들이 못 미더워 둘째인 랑이 아비에게 따로 뒷일을 챙겨보라 하고 세상 버렸소 룡이 아버지는 유지를 뭉개고 뒤탈을 예견한 듯 서둘러 장손인 룡이로 그 땅의 이전등기를 마쳤소 뒤..

[유희경의 시:선] 내 이름 [문화/ 2023-09-27]

사람이 되어 가는 건 왜 이렇게 조용할까 - 김현 내 이름 현은 빛날 현으로 주로 쓰이지만 나는 밝을 현을 좋아한다 빛난다고 해서 밝지 않고 밝다고 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사람이 되어 간다는 건 이름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되어 가는 건 왜 이렇게 조용할까 (김현 시집 ‘장송행진곡’) 내 이름 내 이름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한다. 방금 전 걸려온 전화도 그러했다. 제가 유희경입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건너편에선 깜짝 놀라며 남자분인 줄 몰랐다고 사과를 하는 거였다. “괜찮습니다. 자주 있는 일이에요.” 상대를 안심시켰다. 내 이름을 처음 접하는 어른들은 뜻밖이라는 듯 웃으며 “이름이 참 예쁘구나.” 얼버무렸다. ‘나는 예쁘지 않다는 건가.’ 오랫동안 내 이름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