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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밤길 - 장석남(1965~ ) [동아/ 2020-09-0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밤길 - 장석남(1965~ ) [동아/ 2020-09-05] 밤길 ― 장석남(1965∼ ) 밤길을 걷는다 걸음은 어둠이나 다 가져라 걸음 없이 가고 싶은 데가 있으니 어둠 속 풀잎이나 바람결이나 다 가져라 걸어서 닿을 수 없는 데에 가고 싶으니 유실수들 풋열매 떨어뜨리는 소리 이승의 끝자락을 적신다 그러하다가 새벽달이 뜨면 울올이 풀리는 빛에 걸음을 걸려라 걸려 넘어져라 넘어져 무릎에 철철 피가 넘치고 핏속에 파란 별빛들과 여러 날 시각을 달리해서 뜨던 날 셋방과 가난한 식탁, 옹색한 여관 잠과 마주치는 눈길들의 망초꽃 같은 세미나 꼬부라져 사라졌던 또다른 길들 피어날 것이다 환하고 축축하게 웃으면서 이곳이군 내가 닿은 곳은 이곳이군 조금은 쓰라리겠지 내가 밤길을 걸어서 새벽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성탄제 ― 김종길(1926∼2017) [동아/ 2020-08-2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성탄제 ― 김종길(1926∼2017) [동아/ 2020-08-29] 성탄제(聖誕祭) ― 김종길(1926∼2017)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목에 걸리는 말 - 강인한(1944~ ) [동아/ 2020-08-2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목에 걸리는 말 - 강인한(1944~ ) [동아/ 2020-08-22] 목에 걸리는 말 - 강인한(1944~) 인간을 믿으세요? 쓸쓸히 묻는 당신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다. 밤이 깊어지면 나는 그것을 안다. 까마귀 떼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이 는개 속에서 당신 말의 뼈가 목에 걸린다. 희디흰 당신의 외로움을 등 뒤에서 나는 찌를 수가 없다. 당신의 말은 타오르는 석윳불, 밤이 깊어지면 나의 말은 그 불에도 타지 않는 씨가 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우리는 이성을 가진 특별한 생명체야.’ 이런 뜻이니까 내가 고대인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에 굉장히 기뻤을 것 같다. 한편 기쁜 만큼 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동우 ― 심훈(1901∼1936) [동아/ 2020-08-1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동우 ― 심훈(1901∼1936) [동아/ 2020-08-15] 동우 ― 심훈(1901∼1936) 저 비가 줄기줄기 눈물일진대 세어보면 천만 줄기나 되엄즉허이, 단 한 줄기 내 눈물엔 베개만 젖지만 그 많은 눈물비엔 사태가 나지 않으랴. 남산인들 삼각산인들 허물어지지 않으랴. 야반에 기적소리! 고기에 주린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냐 우리네 젊은 사람의 울분을 뿜어내는 소리냐 저력 있는 그 소리에 주춧돌이 움직이니 구들장 밑에서 지진이나 터지지 않으려는가? 상록수의 작가, 그러니까 소설가로 알고 있지만 심훈은 재능이 많은 ‘멀티플레이어’였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한 민족운동가였고 동아일보 기자였으며 시인이자 연극인, 배우, 각본가,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심훈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문자 ― 김경후(1971∼ ) [동아/ 2020-08-08]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문자 ― 김경후(1971∼ ) [동아/ 2020-08-08] 문자 ― 김경후(1971∼ ) 다음 생애 있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 우리는 정지용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곧잘 기억한다. 유명한 시 몇 편이 따라오는 유명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정지용이 유명한 걸까. 그건 바로 ‘정지용 시집’ 때문이다. 정지용 시집은 1935년에 나왔다. 이 시집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양하는 이에 대해 가난한 우리말이 정지용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말이 되었다고 극찬했다. 정지용의 시집에서 “우리는 조선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정지용의 명성은 그의 모국어 능력과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사람? - 김휘승(1957~) [동아/ 2020-08-01]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사람? - 김휘승(1957~ ) [동아/ 2020-08-01] 사람? ― 김휘승(1957∼) 사람이었을까 사람이 아니었을까, 서로 깃들지 못하는 사람 밖의 사람은. ……지나간다, 아이는 웃고 울고, 때없이 꽃들은 불쑥 피고, 눈먼 웃음 소리, 휙 날아가는 그림자새, 곧 빗발 뿌릴 듯 몰아서 밀려오는 바람에 사람이 스친다, 비바람에 귀가 트일 때 사람이 가까워진다, 서로 사람이기를…… 가다가다 되돌려지는 비, 빗발쯤으로 뿌리겄다. 숨 막바지에 텅 빈 하늘. 우리는 뭔가를 모를 때 사전을 펼쳐본다. 정의가 내려져 있으면 우리는 그 대상을 아는 것만 같다. 그런데 정의는 절대적이지 않다. 어떤 대상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시라는 것은 사전과 많이 닮았다. 다만 우리말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어떤 사람 ― 신동집(1924∼2003) [동아/ 2020-07-2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어떤 사람 ― 신동집(1924∼2003) [동아/ 2020-07-25] 어떤 사람 ― 신동집(1924∼2003)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 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갑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즉히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 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즉히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맬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 허연(1966∼) [동아/ 2020-07-18]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 허연(1966∼) [동아/ 2020-07-18]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 허연(1966∼) 어차피 나는 더 나은 일을 알지 못하므로 강물이 내게 어떤 일을 하도록 내버려둔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강물이 내게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한 번도 서러워하지 않은 채 강물이 하는 일을 지켜본다 나는 오직 강물에만 집중하고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저 천년의 행진이 서럽지 않은 건 한 번도 되돌아간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를 지나온 강물에게 내력을 묻지 않는다 모두 이미 섞인 것들이고 이미 지나쳐버린 것들이고 강변에선 묻지 않는 것만이 미덕이니까 강물 앞에서 나는 기억일 뿐이다 부정확한 시계공이 가끔 있었고 뜻하지 않은 재회가 있기도 하지만 강물의 행진은 이유를..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종점들 ― 이승희(1965∼ ) [동아/ 2020-07-11]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종점들 ― 이승희(1965∼ ) [동아/ 2020-07-11] 종점들 ― 이승희(1965∼ ) 이제 그만 여기서 살까 늙은 버드나무 아래 이름표도 없이 당신과 앉아서 북해의 별이 될 먼지들과 여기와 아무 데나를 양손처럼 매달고 웃었다 세상의 폐허 말고 당신의 폐허 그 둘레를 되짚어가면서 말이죠 폐허의 옷을 지어 입으면 등은 따뜻할까요 머뭇대다가 지나친 정거장들이 오늘 별로 뜨면 이제 어떤 먼 곳도 그립지 않을 테죠 발터 베냐민의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베냐민은 천사가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 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고 썼다. 이쯤 되면 철학자 베냐민이 아니라 시인 베냐민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겠..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1989∼) [동아/ 2020-07-04]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1989∼) [동아/ 2020-07-04]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1989∼)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