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문자 ― 김경후(1971∼ ) [동아/ 2020-08-08]
문자 ― 김경후(1971∼ )
다음 생애
있어도
없어도
지금 다 지워져도
나는
너의 문자
너의 모국어로 태어날 것이다
우리는 정지용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곧잘 기억한다. 유명한 시 몇 편이 따라오는 유명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정지용이 유명한 걸까. 그건 바로 ‘정지용 시집’ 때문이다. 정지용 시집은 1935년에 나왔다. 이 시집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양하는 이에 대해 가난한 우리말이 정지용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말이 되었다고 극찬했다. 정지용의 시집에서 “우리는 조선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정지용의 명성은 그의 모국어 능력과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
문학에서만 모국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국어는 우리의 삶 그 자체에 매우 결정적이다. 문화, 정서, 역사, 소통 모두 모국어 위에 놓여 있다. 모국어를 잃으면 그 모국어로 이루어진 영역을 흡수할 수가 없다. 모국어란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몸을 채우고 있는 절대적인 무엇이다.
김경후 시인은 말을 다루고 사랑하는 시인답게 모국어의 절대적인 속성을 익히 알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모국어의 절대성을 이용해서 간절한 고백을 이루어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지만 이 시는 언어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정 표현을 담고 있다. 너의 과거와, 미래와, 의식과, 표현을 지배하고 있는 모국어가 되고 싶다는 말은 어마어마하다. 이 생에서 이루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이루겠다는 말은 무시무시하다. 하여 색채에 대한 묘사 하나 없이 뜨겁기만 한 이 시를 놓고 생각한다. 이 생에서 나는 누군가의 모국어인 적이 있었던가. 과연 누군가를 모국어로 받든 적이 있었던가.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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