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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추운 사랑 ― 김승희(1952∼ ) [동아/ 2020-11-21]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추운 사랑 ― 김승희(1952∼ ) [동아/ 2020-11-21] 추운 사랑 ― 김승희(1952∼ ) 아비는 산에 묻고 내 아기 맘에 묻네, 묻어서 세상은 재가 되었네, 태양의 전설은 사라져가고 전설이 사라져갈 때 재의 영(靈)이 이윽고 입을 열었네 아아 추워-라고, 아아 추워서 아무래도 우리는 달려야 하나, 만물이 태어나기 그 전날까지 아무래도 우리는 달려가야 하나, 아비는 산에 묻고 내 아기 맘에 묻어 사랑은 그냥 춥고 천지는 문득 빙하천지네…… 시를 왜 읽을까.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읽는 건 분명 아니다. 현대시의 주류는 송가(頌歌)나 풍월(風月)은 아니다. 읽다 보면 오히려 아픈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이라든가 분단, 5월의 광주가 나오는 시들 앞에서는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그 겨울의 시 ― 박노해(1957∼) [동아/ 200-11-14]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그 겨울의 시 ― 박노해(1957∼) [동아/ 2020-11-14] 그 겨울의 시 ― 박노해(1957∼)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11월, 밤이 길어지는 계절은 고민도 생각도 길어지라고 생겨났는가 싶다. 사는 게 어쩜 이리 어려울까. 대체 어째야 잘사는 건지. 어린 자식 살피기도 하루하루 어렵고, 어리지도 않은 내 마음 살피기는 더 어렵다. 손발이 묶인 듯..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이별하는 새 ― 마종기(1939∼ ) [동아/ 2020-11-07]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이별하는 새 ― 마종기(1939∼ ) [동아/ 2020-11-07] 이별하는 새 ― 마종기(1939∼ ) 그럼 잘 가요. 가다가 길 잃지 말고 여린 영혼은 조심히 안고 가야 할 곳 잊지 말고 조심해 가요. 길을 잃고 회오리 속을 헤매며 어디로 가야 할지 당황하다가 나는 눈물까지 흘린 적이 있었다. 먼지만 차 있던 도심의 하늘에서는 눈을 떠도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누르던 창백한 날갯짓도 아무도 비상의 낭만이라 부르지 않았다. 통증을 참던 사이에 길들은 떠나고 가고 싶은 마을은 이미 문을 닫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미망 때문인지 변화무쌍한 한밤의 별에 취해서인지 앞뒤로 찾으며 날아다닌 방탕한 날들이 바로 살아 있는 생의 흔적이란 것을 나는 오래 모르고 비웃기만 했었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행복론 ― 조지훈(1920∼1968) [동아/ 2020-10-31]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행복론 ― 조지훈(1920∼1968) [동아/ 2020-10-31] 행복론 ― 조지훈(1920∼1968) 멀리서 보면 보석인 듯 주워서 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쪽. 아무 데도 없다 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보며 가만히 웃음짓는 것. 아아 !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초가삼간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1967년 10월 27일. 한 일간지에 조지훈의 시 ‘행복’이 실려 있었다. 그로부터 53년이 흘렀고 쉰세 번의 가을이 우리를 스쳐갔다. 그 사이에 사람은 죽고, 사람은 태어나고, 사람은 울고, 사람은 웃었다. 그때와 같은 가을이되 실상은 전혀 같지 않은 가을이라는 사실이 참 묘하다. 53년 전의 행복..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뼈아픈 후회 ― 황지우(1952∼) [동아/ 2020-10-24]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뼈아픈 후회 ― 황지우(1952∼) [동아/ 2020-10-24] 뼈아픈 후회 ― 황지우(1952∼)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가을’ 하면 추수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익은 곡식을 거두는 마음은 겨울을 대비하는 마음.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물 것이고 깊은 뿌리를 가졌을 것이다. 이를테면 정착민의 내면이라고나 할까. 반대로 ‘가을’ 하면 폐허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이 떨어지고 흩어지는 가을은 우리에게 고독이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낙엽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유목민..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 김소형(1984∼ ) [동아/ 2020-10-17]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 김소형(1984∼ ) [동아/ 2020-10-17]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 김소형(1984∼ ) 창과 빛이 있으면 시를 쓸 수 있지 저 창에 쏟아지는 빛으로 질서를 말할 수 있고 문 두드리고 들어오는 빛으로 환대를 말할 수 있고 나의 몸을 떠난 채 등 돌리고 있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어떤 날에는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게 말을 걸 수 있고 그 한마디에 길게 심장이 열릴 수도 있고 열린 심장에서 흰말부리가 지저귈 수 있고 그 지저귐을 들은 벌새가 날아와 삶을 위로할 수 있고 장밋빛 눈물을 물어올 수 있다 눈 없는 나의 발이 그런 눈물을 흘릴 수 있지 그러나 그 창과 빛 아래서 신을 찾는 네가 신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건 신만이 아시겠..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발열 ― 정지용(1902∼1950) [동아/ 2020-10-1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발열 ― 정지용(1902∼1950) [동아/ 2020-10-10] 발열 ― 정지용(1902∼1950) 처마 끝에 서린 연기 따라 포도순이 기어나가는 밤, 소리 없이, 가물음 땅에 쓰며든 더운 김이 등에 서리나니, 훈훈히,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아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쉬노니, 박나비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다신교도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한 하늘에는 별들이 참벌 날으듯하여라. 오늘은 한글로 쓰인 우리 문학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나는 국문학과를 나왔다. 나올 때는 정신 차리고 나왔는데 들어갈 때는 그렇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이미..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남산 가는 길― 민병도(1953∼) [동아/ 2020-09-2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남산 가는 길― 민병도(1953∼) [동아/ 2020-09-26] 남산 가는 길 ― 민병도(1953∼) 구름을 타고 가네, 걸어서는 가지 못하네 넘어져 본 사람만이 저 산에서 짐작하리라 산새도 슬픔이 있어 돌아앉아 운다는 것을 바람은 제 입 속으로 마른 댓잎을 던져 넣고 연꽃을 든 문수보살 돌 밖으로 나투시면 첫눈이 절 가는 길을 허리춤에 숨기네 누가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세월이라 했나 살점이 뜯겨지고 코마저 깨어져나간 마애불, 발아래 서면 새털만 한 삶의 무게여 살아 이미 삶을 건너고 죽음에서도 돌아와 꿈은 다시 땀 흘리며 먼 시간을 실어오지만 언제나 사람의 길은 마음에서 시작되네 "코로나가 끝나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웹서핑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종종 만난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아침 식탁 ― 이우걸(1946∼ ) [동아/ 2020-09-1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아침 식탁 ― 이우걸(1946∼ ) [동아/ 2020-09-19] 아침 식탁 ― 이우걸(1946∼ ) 오늘도 불안은 우리들의 주식이다 눈치껏 숨기고 편안한 척 앉아보지만 잘 차린 식탁 앞에서 식구들은 말이 없다 싱긋 웃으며 아내가 농을 걸어도 때 놓친 유머란 식상한 조미료일 뿐 바빠요 눈으로 외치며 식구들은 종종거린다 다 가고 남은 식탁이 섬처럼 외롭다 냉장고에 밀어 넣은 먹다 남은 반찬들마저 후일담 한마디 못한 채 따로 따로 갇혀 있다 현대시조란 바로 이런 것이다. 무심코 읽어보면 자유롭게 써 내려간 작품 같지만, 유심히 읽다 보면 뭔가 느낌이 온다. 본래 느낌이란 바람 사이로 스미는 향기와 같은 것. 우리는 자유로운 글자들의 유영 가운데서 형식의 절제가 녹아 있음을 느낄 수..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힘의 동경 ― 오상순(1894∼1963) [동아/ 2020-09-1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힘의 동경 ― 오상순(1894∼1963) [동아/ 2020-09-12] 힘의 동경 ― 오상순(1894∼1963) 태양계에 축이 있어 한 번 붙들고 흔들면 폭풍에 사쿠라 꽃같이 별들이 우슈슈 떨어질 듯한 힘을 이 몸에 흠뻑 느껴보고 싶은 청신한 가을 아침― 이 시는 공초 오상순의 것이다. 공초 선생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고, 집도 없었다. 하물며 시인이라면 한두 권 있을 법한 시집도 없어 영면 이후에 친구들과 후배들이 시집을 마련했다. 유고 시집이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었다. 공초(空超)라는 호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세속에 초탈해 있는 시인의 삶을 상징한다. 불교계의 무소유가 법정 스님이라면, 문단계의 무소유는 공초 선생인 셈이다. 시가 수록된 지면은 19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