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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뜨락 ― 김상옥(1920∼2004) [동아/ 2021-07-03]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뜨락 ― 김상옥(1920∼2004) [동아/ 2021-07-03] 뜨락 ― 김상옥(1920∼2004) 자고나면 이마에 주름살, 자고나면 뜨락에 흰 라일락. 오지랖이 환해 다들 넓은 오지랖 어쩌자고 환한가. 눈이 부셔 눈을 못 뜨겠네. 구석진 나무그늘 밑 꾸물거리는 작은 벌레. 이날 이적지 빛을 등진 채 빌붙고 살아 부끄럽네. 자고나면 몰라볼 이승, 자고나면 휘드린 흰 라일락. 시인들은 때로 시작 노트라는 것을 쓴다. 신작시를 발표할 때, 시를 쓸 때의 마음이라든가 작품 해설을 짧게 붙인 것을 말한다. 사실 시작 노트는 흔하지 않다. 대개의 시인들은 설명을 삼간다. 시는 시 그대로, 읽는 이의 마음으로 날아가 살아야 한다. 거기에 시인의 해설을 얹으면 시는 무거워져 날 수가 없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1966∼ ) [동아/ 2021-06-2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1966∼ ) [동아/ 2021-06-26] 벽시계가 떠난 자리 ― 박현수(1966∼ ) 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사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생명을 사랑한다. 반대로 생명 외의 ‘사물’에 대해서는 좀 차갑게 보는 경향이 있다. ‘사물화’라는 말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도구로 전락하면 우리는 ‘사물화’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시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시는 녹슨 깡통, 타고 남은 연탄재, 사금파리 하..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00〉혹등고래 ― 정채원(1951∼) [동아/ 2021-06-1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00〉혹등고래 ― 정채원(1951∼) [동아/ 2021-06-19] 혹등고래 ― 정채원(1951∼) 이따금 몸을 반 이상 물 밖으로 솟구친다 새끼를 낳으러 육천오백 킬로를 헤엄쳐온 어미 고래 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 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새끼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그것도 더 크면 알게 되겠지 어미는 새끼에 젖을 물린 채 열대 바다를 헤엄친다 그런 걸 알게 될 때쯤 새끼는 극지의 얼음 바다를 홀로 헤엄치며 어쩌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도 있겠지 혹등고래는 멀리에 있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저 고래는 우리 동네에..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횡단보도 ― 고두현(1963∼ ) [동아/ 2021-06-1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횡단보도 ― 고두현(1963∼ ) [동아/ 2021-06-12] 횡단보도 ― 고두현(1963∼ ) 너 두고 돌아가는 저녁 마음이 백짓장 같다. 신호등 기다리다 길 위에 그냥 흰 종이 띠로 드러눕는다. 몸이 괴로우면 푹 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마음이 괴로울 때, 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황망할 때, 슬플 때, 화가 치밀 때는 오히려 걸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없이 걷고 있을 때 감정은 좀 가라앉는다. 빠른 걸음에 집중해서 괴로움을 잊어보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이럴 때 마주치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은 결코 이롭지 않다. 그것들은 억지로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다. 발길이 붙잡히면 마음도 붙잡히는 법, 괴로움은 이때다 싶어 다시 돌아온다. 횡단보도 앞에서 겨우 참았던 눈..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유월설 ― 김지유(1973∼ ) [동아/ 2021-06-0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유월설 ― 김지유(1973∼ ) [동아/ 2021-06-05] 유월설 ― 김지유(1973∼ ) 웃음이야 아니, 통곡이야 밤새 그림자 꿰맨 속말이 콧구멍으로 터진 거야 벚꽃 아래 맛본 도다리 쑥국처럼 까꿍, 속살로 피워 올린 꽃잔치라지만 지상의 모든 애인 손가락보다 야윈 미소라고 눈물 감추어 만나는 이별이라고 전부 내어주는 일이란 유월에 내리는 함박눈 같은 거 잊지 말자니, 모두 잊히고 꾹 참고 맞던 아이의 불주사처럼 지워진 그림자 닻 내리고 처량하게 무심하게 식어가는 심장을 살아내는 일 내 웃음과 당신 눈물에 무관심하던 계절 접을 때 호접몽, 꿈은 닫혔다 열리는 지상낙원이므로 깜빡 취해 웃었다 운다 해도 모두가 희디흰 꽃잔치, 곧 녹아 없어질 유월의 시린 사랑설 통곡이야 그래,..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5월 ― 차창룡 시인(1966∼ ) [동아/ 2021-05-2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5월 ― 차창룡 시인(1966∼ ) [동아/ 2021-05-29] 5월 ― 차창룡 시인(1966∼ ) 이제는 독해져야겠다 나뭇잎이 시퍼런 입술로 말했다 이제는 독해져야겠다 나뭇잎이 시퍼런 입술로 말했다 내 친구들이 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내 친구들이 독해지고 성공하려는 내 친구들도 독해지고 실패한 친구들도 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다는 것은 외로워진다는 것 독해지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도 달라질 수는 없을까 달팽이가 갑옷을 입고 풀잎에 앉을 때 민달팽이가 맨몸으로 맨땅을 기어가듯이 이제는 독해져야겠다 달라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독해져야겠다 이제는 독해져야겠다 나뭇잎이 또 시퍼런 입술로 말했다 5월은 녹음이 짙어지는 때다. 그것을 우리는 대개 즐거워한..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콩알 하나 ― 김준태(1948∼ ) [동아/ 2021-05-2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콩알 하나 ― 김준태(1948∼ ) [동아/ 2021-05-22] 콩알 하나 ― 김준태(1948∼ ) 누가 흘렸을까 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 난 보따리에서 빠져 떨어졌을까 역전 광장 아스팔트 위에 밟히며 뒹구는 파아란 콩알 하나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 들어 도회지 밖으로 나가 강 건너 밭 이랑에 깊숙이 깊숙이 심어 주었다 그때 사방 팔방에서 저녁 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로스의 연인 이름은 프시케다. 그리스어로 그녀의 이름은 ‘영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생명’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렇다면 생명은 영혼과 마찬가지로 쉽게 볼 수 없겠구나. 생명은 나비처럼 아름답지만 쉽게 바스라질 수도 있겠구나. 그녀의 이름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모일 ― 박목월(1915∼1978) [동아/ 2021-05-1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모일 ― 박목월(1915∼1978) [동아/ 2021-05-15] 모일 ― 박목월(1915∼1978) 시인이라는 말은 내 성명 위에 늘 붙는 관사. 이 낡은 모자를 쓰고 나는 비오는 거리로 헤매였다. 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줍잖은 것 또한 나만 쳐다보는 어린 것들을 덮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것. 허나, 인간이 평생 마른옷만 입을가부냐. 다만 모발이 젖지 않는 그것만으로 나는 고맙고 눈물겹다. 박목월, 하면 ‘모밀묵’이 생각난다. 그의 시 ‘적막한 식욕’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인은 “모밀묵이 먹고 싶다”면서 그것을 ‘싱겁고 구수하고 소박하고 점잖은 음식’이라고 표현했다. 봄날 해질 무렵, 허전한 마음에 먹는 음식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지금 같은 늦봄, 더군다나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옛 벗을 그리며 ― 지훈에게 ― 박남수(1918∼1994) [동아/ 2021-05-08]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옛 벗을 그리며 ― 지훈에게 ― 박남수(1918∼1994) [동아/ 2021-05-08] < 옛 벗을 그리며 ― 지훈에게 ― 박남수(1918∼1994) 나는 회현동에 있고 당신은 마석에 있습니다. 우리는 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성북동에 살고 있었고 나는 명륜동에 살고 있었을 때에도 우리가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나는 이승에 있고 당신은 저승에 있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헤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일본에서 대학의 학생이었고 당신은 서울에서 역시 대학의 학생이었을 때에도 우리는 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5월은 만남의 달이다. 우리가 만남을 기뻐하는 이유는 헤어짐이 어렵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이별이 쉬워질 줄 알았는데 아니다. 연습하면 이별을 잘할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저수지 ― 권정우(1964∼) [동아/ 2021-05-01]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저수지 ― 권정우(1964∼) [동아/ 2021-05-01] 저수지 ― 권정우(1964∼) 자기 안에 발 담그는 것들을 물에 젖게 하는 법이 없다 모난 돌멩이라고 모난 파문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검은 돌멩이라고 검은 파문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산이고 구름이고 물가에 늘어선 나무며 나는 새까지 겹쳐서 들어가도 어느 것 하나 상처입지 않는다 바람은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수면 위의 줄글을 다 읽기는 하는 건지 하늘이 들어와도 넘치지 않는다 바닥이 깊고도 높다 매년 5월이 되면 정신이 확 든다. 벌써 2021년도 이만큼이나 갔구나 싶어서 마음이 급해진다. 인간관계도 돌아보게 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챙길 일이 많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애틋한 건 어버이날이다. 부모님과 몇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