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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다정이 나를 ― 김경미(1959∼) [동아/ 2021-02-0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다정이 나를 ― 김경미(1959∼) [동아/ 2021-02-06] 다정이 나를 ― 김경미(1959∼)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꽃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 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이 쓴 시조의 종장이다. 무려 고려 후기에 나온 작품이다. 그런데 700년 동안 잊히지 않고, 변하지 않은 건 비단 시조만은 아닌 것 같다. 아주 오래전에 시가 되었던 어떤 마음을, 오늘의 우리도 똑같이 느낀다. 때로 시는 시간을 넘어서 온다. 이조년의 ‘다정가’가 고려 말의 것이라면 김경미의 ‘다정가’는 오늘의 것이다. 원래 다정가는 봄의 노래다. 봄바람처럼 달콤하고 씁쓸한..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포기하고 싶다면 ― 홍지호(1990∼ ) [동아/ 2021-01-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포기하고 싶다면 ― 홍지호(1990∼ ) [동아/ 2021-01-30] 포기하고 싶다면 ― 홍지호(1990∼ ) 옥상에 올라온 참새를 보고 놀라다가 아 너는 새지 너는 날 수가 있지, 라고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아 있다 너무 위험하다고 느껴질 때는 나에게 전화해도 된다고 선생님이 말해줄 때 고마웠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삶은 어디에나 삶은 어디에 삶은 어디 삶은 동생이 비둘기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해줄 때 느꼈던 감격이 때때로 그에게 힘이 되기를 기도했다 하나도 안 슬퍼 생각했던 장면에서 울게 되었다 그런 장면은 이제 슬프다 그러나 어떤 장면은 여전히 슬퍼하지 못한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은 미안한 마음만 이런 삶을 나누고 싶지는 않다 어디에서든 삶은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영목에서 ― 윤중호 시인(1956∼2004) [동아/ 2021-01-23]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영목에서 ― 윤중호 시인(1956∼2004) [동아/ 2021-01-23] 영목에서― 윤중호 시인(1956∼2004)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시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시.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귤 한 개 ― 박경용(1940∼ ) [동아/ 2021-01-1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귤 한 개 ― 박경용(1940∼ ) [동아/ 2021-01-16] 귤 한 개 ― 박경용(1940∼ ) 귤 한 개가 방을 가득 채운다. 짜릿하고 향깃한 냄새로 물들이고, 양지짝의 화안한 빛으로 물들이고, 사르르 군침 도는 맛으로 물들이고, 귤 한 개가 방보다 크다. 노트북을 새로 샀다. 옛날에 샀던 것보다 속도는 빨라졌는데 가격은 싸졌다. 의외로 씁쓸하다. 노트북의 노선은 일종의 상징이다. 시대는 사람에게도 노트북과 같은 변화를 기대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터에서도 업무 효율은 더 높아지고 노동가치는 더 내려갈 것이다. 이미 바쁘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욱 바쁠 예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 개발된 노트북이 아니다. 더 많은 업무를 더욱 빨리 처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폭설 - 유자효(1947~ ) [동아/ 2021-01-0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폭설 - 유자효(1947~ ) [동아/ 2021-01-01] 폭설 ― 유자효(1947∼)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온 어린 노루 사냥꾼의 눈에 띄어 총성 한 방에 선혈을 눈에 뿌렸다 고통으로도 이루지 못한 꿈이 슬프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보리 풍년이 든다’는 속담이 있다. 눈은 어디에서 봐도 눈인데 입장이 다르면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 새삼스럽다. 농부에게 겨울 눈이 보리 풍년이라면 운전자에게 대설은 재앙이다. 제설차 입장에서 눈은 일이고, 라이더 입장에서 눈은 위험이다. 에스키모가 눈 색깔을 구분하는 여러 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눈의 의미들을 하나씩 배우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이 시는 눈의 뜻에 슬픔이라는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한다. 눈이 쌓이면 먹이가 없겠지...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담에 빗자루 기대며 ― 신현정(1948∼2009) [동아/ 2021-01-0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담에 빗자루 기대며 ― 신현정(1948∼2009) [동아/ [2021-01-02] 담에 빗자루 기대며 ― 신현정(1948∼2009)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거 얼마만이냐 여기 땅집으로 이사와 마당을 쓸고 또 쓸고 한다 얼마만이냐 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만이냐 마당에 물 한 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만이냐 땅 놀래켜보는 거 얼마만이냐 어제 쓸은 마당, 오늘 또 쓸고 한다 새벽같이 나와 쓸 거 없는데 쓸고 또 쓸고 한다 마당 쓸고 나서 빗자루를 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는다 빗자루야 그래라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 도깨비하여라. 묵은해가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새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정해 놓은 약속일 뿐이라고 해도, 약속의 의미가 참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12월 ― 홍윤숙(1925∼2015) [동아/ 2020-12-2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12월 ― 홍윤숙(1925∼2015) [동아/ 2020-12-26] 12월 ― 홍윤숙(1925∼2015)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 생애의 다리 건너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이따금 하늘엔 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 늦은 날 눈발 속을 걸어와 후득후득 문을 두드리는 두드리며 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영혼 돌아오는 소리 “그런 멋진 일은 다음 생에서나 가능할 거야. 이번 생은 글렀어.” 친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했다가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다음 생이라니. 인생에서 리셋이 가능할 리 없는데 우리는 게임을 너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우주인 - 김기택(1957∼ )[동아/ 2020-12-1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우주인 - 김기택(1957∼ )[동아/ 2020-12-19] 우주인 ― 김기택(1957∼ ) 허공 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허공에서 허우적 발을 빼며 걷지만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 기댈 무게가 없다는 것은 걸어온 만큼의 거리가 없다는 것은 그동안 나는 여러 번 넘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제자리만 맴돌고 있거나 인력에 끌려 어느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자국 발자국이 보고 싶다 뒤꿈치에서 튕겨 오르는 발걸음의 힘찬 울림을 듣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고 삐뚤삐뚤한 길이 보고 싶다 문학에도 영화에도 ‘장르물’이라는 영역이 있다. 장르물이란 특유의 문법이나 규칙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콘텐츠를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SF 영화는 우리가 가장 자주 접하..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1949∼ ) [동아/ 2020-12-1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1949∼ ) [동아/ 2020-12-12]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1949∼ )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상담 시간에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어디도 가지 못하고, 무엇도 하지 못하는데, 지금 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어린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이 여러 권리를 박탈당했다. 게다가 아, 청춘은 준비할 권리마저 빼앗겼구나. 맑은 눈동자 앞에서 시절 탓을 하는 건 비겁하니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학생을 보내고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꼬부랑 할머니 ― 남재만(1937∼ ) [동아/ 2020-12-0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꼬부랑 할머니 ― 남재만(1937∼ ) [동아/ 2020-12-05] 꼬부랑 할머니 ― 남재만(1937∼ ) 삶이 뭔지, 난 묻지 않으리. 저어기 저 할머니 꼬부랑 할머니 구십을 넘게 살았어도. 삶이 뭔지 그게 도대체가 뭔지 아직도 알 수가 없어. 저렇게 의문표가 되어 온몸으로 묻고 있는데, 난 묻지 않으리. 삶이 뭔지 뭐가 삶인지 내사 묻지 않으리. 며칠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수험생이 아니고, 수험생을 키우고 있지 않으며 수험생을 알지도 못하는데 매년 수능 날 아침이 되면 경건한 심정이 된다. 경건이란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다’는 뜻이다. 종교랑은 어울리지만 시험이나 학생하고는 참 안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토록 안 어울리지만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