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12월 ― 홍윤숙(1925∼2015) [동아/ 2020-12-26]
12월 ― 홍윤숙(1925∼2015)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
생애의 다리 건너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이따금 하늘엔
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
늦은 날 눈발 속을
걸어와 후득후득 문을 두드리는
두드리며 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영혼 돌아오는 소리
“그런 멋진 일은 다음 생에서나 가능할 거야. 이번 생은 글렀어.” 친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했다가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다음 생이라니. 인생에서 리셋이 가능할 리 없는데 우리는 게임을 너무 많이 했나 보다. 게다가 다음 생이 온대도 지금보다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원래 인생에는 찬란함보다 고난의 비율이 더 큰 법이다. 인생의 기쁨이 돌멩이처럼 흔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금처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은 12월, ‘다음 생’은 너무 멀고 ‘다음 해’는 가장 가까운 때다. 우리의 다음 해에도 아주 멋진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올해처럼 많은 고난과 적은 기쁨이 예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살고 싶고, 겪고 싶고, 기다리고 싶다. 어느 누구의 삶이라고 매 순간 즐거웠을까. 우리는 추위 속에서, 어둠 속에서, 빛 속에서 한결같이 살아 있고 살아간다.
이게 12월의 마음이다. 아름답지도 않을 다음 해를 착실하게, 끈질기게 생각하고 기다리는 마음의 달. 그래서 홍윤숙의 ‘12월’을 소개한다. 이 시에는 따뜻함이나 환희는 없다. 시인에게 지난 한 해는 안개, 바람, 북풍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삶의 민낯은 생각보다 척박하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즐겁지 않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못난 자식이 그렇게 애틋하고 소중할 수 없다. 12월에 기다리는 다음 해도 그렇다. 기쁨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의 내년은 이미 소중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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