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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내가 천사를 낳았다 - 이선영(1964∼ ) [동아/ 2023-04-15]

내가 천사를 낳았다 - 이선영(1964∼ ) 내가 천사를 낳았다 배고프다고 울고 잠이 온다고 울고 안아달라고 우는 천사, 배부르면 행복하고 안아주면 그게 행복의 다인 천사, 두 눈을 말똥말똥 아무 생각 하지 않는 천사 누워 있는 이불이 새것이건 아니건 이불을 펼쳐놓은 방이 넓건 좁건 방을 담을 집이 크건 작건 아무것도 탓할 줄 모르는 천사 내 속에서 천사가 나왔다 내게 남은 것은 시커멓게 가라앉은 악의 찌끄러기뿐이다. 사람의 목숨에는 경중이 없다. ‘나의 것’을 주장할 줄 모르는 어린이라고 해서 그의 목숨을 가볍게 볼 수 없고, 오래 산 노인이라고 해서 그의 죽음을 당연하다 볼 수 없다. 당연한 것은 생명이 생겨나는 자연스러움, 인생의 거칠 과정을 다 거친 후에 흙으로 돌아가는 이치뿐이다. 분명 모든 목..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뻐꾸기 - 박경용(1940∼) [동아/ 2023-04-08]

뻐꾸기 - 박경용(1940∼) 뻐꾸기 울음을 걸어서 내 어린 날로 간다. 발가숭이에 까까머리 맨발에 아장걸음 아직 하나도 늙지 않은 내 어린 날의 그 울음 속 뻐꾸기를 따라서. 갈앉은 녹음유황 마알갛게 뜬 아카시아분향 하얀 길 위에 깔린 그날의 내 앙앙울음 울음 끝 추스림같은 아카시아향의 긴긴 꼬리를 밟아서. (후략) 다들 봄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올해 봄은 서둘러 왔다. 개나리, 목련, 벚꽃은 제 차례를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의 3월은 4월의 풍경을 미리 끌어다 써버렸다. 사과꽃은 평년보다 열흘 일찍 피었고 한 달은 기다려야 했을 아카시아 향기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쁜 인간의 삶을 닮아가는지 우리의 봄마저 바빠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름과 더위와 녹음도 더 일찍 찾아올..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릉, 묘, 총 - 김현(1980∼ ) [동아/ 23-04-01]

릉, 묘, 총 - 김현(1980∼ ) 남자 둘이 의릉 보러 가서 의릉은 못 보고 꽃나무 한 그루 보고 왔다 넋이 나가서 나무엔 학명이 있을 테지만 서정은 그런 것으로 쓰이지 않는다 삶이라면 모를까 연우 아빠가 연우 때문에 식물도감을 샀다 웃고 있는 젊은 아빠가 아장아장 어린 아들을 그늘에 앉히고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는 풍경을 그렇게 많은 시에서 보고도 나는 쓴다 도무지 가질 수 없어서 아름답다 여긴다 포기하면 쉬워진다 (하략) 꽃이 한창이다. 팍팍하게 살다가도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곱지 않은 꽃이 없고 멈춰서 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설레는 마음이 옮을 것 같다. 잠시라도 봄소풍을 다녀와야 할 분위기다. 이 시에도 산책에 나선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의릉을 찾아갔다. 서울 성북구..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낮게 부는 바람 - 유혜빈(1997∼ ) [동아/ 223-03-25]

낮게 부는 바람 - 유혜빈(1997∼ ) 그건 정말이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잠들도록 한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도록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일이야 늦은 여름 아침에 누워 새벽을 홀딱 적신 뒤에야 스르르 잠들고자 할 때 너의 소원대로 스르르 잠들 수 있게 되는 날에는 저 먼 곳에서 너는 잠깐 잊어버리고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한 사람이 너를 잠들게 하는 것이라는 걸 멀리서 너의 이마를 아주 오래 쓰다듬고 있다는 걸 아무래도 너는 모르는 게 좋겠지 아이들 출석을 부를 때, 대답하는 목소리가 제일 씩씩한 시기가 3월이다. 설렘의 달이고, 시작의 달이라는 말이다. 반대로, 아파서 결석하는 학생이 제일 많은 달도 3월이다. 이상하게도 3월에는 자주 아프고 호되게 아프다. 나..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사모곡 - 감태준(1947∼ ) [동아/ 2023-03-18]

사모곡 - 감태준(1947∼ )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멀리 걸었다. “당신을 사모합니다.” 이런 고전적인 고백에서의 ‘사모’와 사모곡의 ‘사모’는 서로 다른 단어다. 사모곡(思母曲)은 그냥 사랑 노래가 아니라, 딱 ‘어머니’에게만 한정해서 바치는 노래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가 얼마나 많았던지 이제 사모곡은 하나의 유형처럼 여겨진다. 사모곡이라는 제목의 시만 모아도 시집 몇 권은 족히 만들 수 있을 정도다. 맨 처음, 고려가사 ‘사모곡’이 등장했을 때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추모곡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사모곡이라고 하면 대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그리움을 담고 있다. 그래서 사모곡을 읽고 나면 가슴이 미..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묘비명 - 박중식(1955∼ ) [동아/ 2023-03-11]

묘비명 - 박중식(1955∼ ) 물은 죽어서 물 속으로 가고 꽃도 죽어 꽃 속으로 간다 그렇다 죽어 하늘은 하늘 속으로 가고 나도 죽어서 내 속으로 가야만 한다. 우리의 봄은 항상 새봄이다. 조병화 시인의 ‘해마다 봄이 되면’에 보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 말처럼 봄은 새로움의 상징인 것이다. 새싹, 새 학기, 새 친구로 채워진 봄은 사람의 마음마저 싱그럽게 만든다. 그런데 봄은 과연 새롭기만 할까. 3월의 찬란함은 이상하게 기시감이 든다. 봄이 되면 ‘내가 아는 그 봄이 왔구나’ 하는 안도감도 든다. 봄은 새로운 것이면서 동시에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낯모를 봄이 우리에게 찾아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봄이 드디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일러 우리는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호수 - 조병화 (1921∼2003) [동아/ 2023-03-04]

호수 - 조병화 (1921∼2003) 물이 모여서 이야길 한다 물이 모여서 장을 본다 물이 모여서 길을 묻는다 물이 모여서 떠날 차빌 한다 당일로 떠나는 물이 있다 며칠을 묵는 물이 있다 달폴 두고 빙빙 도는 물이 있다 한여름 길을 찾는 물이 있다 달이 지나고 별이 솟고 풀벌레 찌, 찌, 밤을 새우는 물이 있다 뜬눈으로 주야 도는 물이 있다 구름을 안는 물이 있다 바람을 따라가는 물이 있다 물결에 처지는 물이 있다 수초밭에 혼자 있는 물이 있다 한 해의 첫 달은 1월이지만 어쩐지 희망찬 시작은 3월의 몫인 것 같다. 긍정적인 미래를 보고 싶을 때에는 조병화 시인이 제격이다. 그래서 3월을 맞이하여 조병화 시인의 시를 한편 소개한다. 호수를 오래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은 호..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역 - 한성기(1923∼1984) [동아/ 2023-02-25]

역 - 한성기(1923∼1984)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나는 누굴까.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질문은 눈앞에 있는데 답은 숨어 있다. 나는 누굴까. 질문은 하나인데 대답은 자꾸 달라진다. 나는 누굴까. 질문은 처음부터 있었는데 대답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라이프니치라는 철학자는 나는, 너는, 모든 존재는 주름이라고 설명했다. 켜켜이 겹쳐진 주름처럼 존재는 그 안에 무한히 다른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이 맞다면 ‘나는 누굴까’의 대답은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유리창 - 김기림(1908∼?) [동아/ 2023-02-18]

유리창 - 김기림(1908∼?) 여보 내 마음은 유린가 봐, 겨울 한울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 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 체하더니 하로밤 찬 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러간 뒷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 밤마다 날어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 마음은 유린가 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유리창’이라는 제목을 들으면 정지용의 것을 떠올리기 쉽다. 정지용의 작품도 탁월하지만 김기림의 ‘유리창’ 역시 그에 못지않다. 그 둘은 1930년대 한국 문단의 대표들이었다. 그들이 같은 제목의 서로 다른 시를 썼다는 우연이 퍽 신기하다. 게다가 묘하게 겹치는 점도 있다. 정지용도 그랬지만 김기림도 ‘유리창’ 앞에서는 속마음을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미명의 날 - 김남조(1927∼ ) [동아/ 2023-02-11]

미명의 날 - 김남조(1927∼ ) 우리 두 목숨에 이 한 번이면 흡족합니다 신이여 구원을 베푸소서 여윈 초 한 자루도 신목인양 바라뵈는 통절한 눈짓 이러한 저희를 살펴주소서 불빛 지워지고 심지마저 수은처럼 식어버리고 그뿐, 하늘의 어느 별 하나라도 사람을 위해 슬퍼하는 것이랍디까 견디며 견디며 살아야지요 목에도 가슴에도 감겨오는 이 미명의 날들을… 사람 옆에 사람을 두신 하느님 당신께선 저희의 이런 날을 감당해 주셔야 할 것이나이다 놀라면 자연스럽게 ‘엄마’를 부르게 된다. 엄마가 곁에 있어도 부르고 곁에 없어도 부른다. 그럴 때 외치는 ‘엄마야’ 소리에는 ‘깜짝 놀랐어요. 십년감수했네요’라는 뜻이 들어 있다. 비슷하게는 ‘세상’을 부르기도 한다. ‘세상에나’라는 말은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기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