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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연년생 - 박준(1983∼ ) [동아/ 2023-08-26]

연년생 - 박준(1983∼ ) 아랫집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마다 형 지훈이는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울고 동생 지호는 엄마, 엄마 하고 운다 그런데 그날은 형 지훈이가 엄마, 엄마 울었고 지호는 옆에서 형아, 형아 하고 울었다 8월 늦장마가 지겹다면 박준의 시집을 추천한다. 5년 전에 나온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읽다 보면 장마의 쓰임새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장마라고 해도 당신과 함께 볼 수 있다면 싫지 않다. 장마여도 당신과 함께 겪는다면 감사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소중한 ‘당신’이 있다. 아무리 나 자신만 중요한 현대사회라고 해도 우리는 때로 나 때문이 아니라 소중한 당신 때문에 살아간다. 그러니까 죽지 말자. 제발 죽이지 말자. 같은 시집에 이 시가 실려 있..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새들은 저녁에 울음을 삼킨다네 - 유종(1963∼ ) [동아/ 2023-08-19]

새들은 저녁에 울음을 삼킨다 - 유종(1963∼ ) 전깃줄에 쉼표 하나 찍혀 있네 날 저물어 살아 있는 것들이 조용히 깃들 시간 적막을 부르는 저녁 한 귀퉁이 출렁이게 하는 바람 한줄기 속으로 물어 나르던 하루치 선택을 던지고 빈 부리 닦을 줄 아는 작은 새 팽팽하게 이어지는 날들 사이를 파고 들던 피 묻은 발톱들 줄을 차고 날아오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 지하로 곤두박질하고 싶은 본능 둥지에 재울 시간이면 흐느낌의 진실은 땅속으로 흐르고 추락하는 새의 붉은 슬픔을 안다네 그래서 숲에 들기 전 노을 든 하늘을 날다 스스로 붉은 슬픔이 되어 울음을 삼킨다네 이 고요한 풍경은 어디에서 왔을까. 적막한 시간을 오래, 자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시인은 평생 철도원으로 살았다. 이력을 알면 우..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여름의 칼 - 김소형(1984∼ ) [동아/ 2023-08-12]

여름의 칼 - 김소형(1984∼ ) 화난 강을 지난 우리는 툇마루에 앉았다 참외를 쥐고 있는 손 예전부터 칼이 무서웠지 그러나 무서운 건 칼을 쥔 자의 마음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칼은 알아야 한다 여름의 창이 빛나고 열차는 북쪽으로 움직이고 강가에서 사람은 말을 잃고 있었다 (하략) 우리 현대시에서 ‘칼’이란 자주 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시인들은 꽃이나 나무, 별이나 달빛을 간절히 쥐고 싶어 했지, 칼은 즐겨 잡지 않았다.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가까이에서는 이형기 시인, 조금 더 멀리서는 유치환 시인에게서 칼의 시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시인은 연약한 자아를 단련시키려는 뜻에서 칼의 이미지를 가져왔다. 다시 말하자면 내적이고 강한 정신력이 바로 칼의 진짜 의미였다. 결코 다른..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울고 싶은 마음 - 박소란(1981∼ ) [동아/ 2023-08-05]

울고 싶은 마음 - 박소란(1981∼ ) 그러나 울지 않는 마음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버스에 앉아 울지 않는 마음 창밖을 내다보는 마음 흐려진 간판들을 접어 꾹꾹 눌러 담는 마음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없겠다 없는 마음 비가 오면 비가 오고 버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나는 다만 기다리는 것 (하략) 그 사람 왜 좋아하냐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좋은 데에는 이유가 없다. 어느 순간 ‘아!’ 하고 좋아지는 거다. 박소란 시인의 작품은 그렇게 좋아지는 시다. 잔잔하게 다가와 오래 수런거리는 시. 첫 시집 제목처럼 ‘심장에 가까운 말’의 시. 이런 시를 좋아하신다면 박소란 시인이 정답이다. 나도 언제 새 시집이 나오나 서점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특히나 그의 시는 힘들 때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교실 창가에서 - 김용택(1948∼ ) [동아/ 2023-07-29]

교실 창가에서 - 김용택(1948~ )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교실 창 밖 강 건너 마을 뒷산 밑에 보리들이 어제보다 새파랗습니다 저 보리밭 보며 창가에 앉아 있으니 좋은 아버지와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하시던 형님이 생각납니다 운동장 가에 살구나무 꽃망울은 빨갛고 나는 새로 전근 와 만난 새 아이들과 정들어갑니다 아이들이 내 주위에서 내게 다가왔다 저 멀리 멀어지고 멀어졌다가는 어제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들이 마치 보리밭에 오는 봄 같습니다 (중략) 봄이 오는 아이들의 앞과 등의 저 눈부심이 좋아 이 봄에 형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이 시를 쓴 김용택 시인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38년 동안 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낼 때에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담은 동시집을 내기도 했다. 대대로 우..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수척1 - 유병록(1982~ ) [동아/ 2023-07-22]

수척1 - 유병록(1982∼ ) 슬픔이 인간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좋은 것이라고 배웠다. 비가 와야 싹이 트고,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맺힌다고 했다. 물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배웠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고, 기본 4원소의 첫 번째라고 했다. 이 말은 오래도록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계속 사실이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비가 좋고 물이 좋다는 이 말을 영영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비가 길을 집어삼키고, 집을 삼키더니, 사람도 삼켜버렸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은 구해야지 싶은데 구할 수가 없다. 사라진 사람은 나타나야지 싶은데 나타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은 함께하고 싶은데 함께할 수가 없다. 비와 물이 사람을 삼켜버..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로맨스 - 서효인(1981∼ ) [동아/ 2023-07-15]

로맨스 - 서효인(1981∼ )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내 이름을 검색하고 빌어먹을 동명이인들 같은 직군들 또래들 심사위원들 수상자들 주인공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데 남들은 괴이쩍게 평온하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시는 좀 고리타분하지 않으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 시를 보여주고 싶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여간 고맙지 않아 - 한영옥(1950∼ ) [동아/ 2023-07-08]

여간 고맙지 않아 - 한영옥(1950∼ ) 어제의 괴로움 짓눌러주는 오늘의 괴로움이 고마워 채 물 마르지 않은 수저를 또 들어올린다 밥 많이 먹으며 오늘의 괴로움도 대충 짓눌러버릴 수 있으니 배고픔이 여간 고맙지 않아 내일의 괴로움이 못다 쓸려 내려간 오늘치 져다 나를 것이니 내일이 어서 왔으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자고 일어나는 일이 여간 고맙지 않아 봄 여름 가을 없이 둘레둘레 피어주는 꽃도 여간 고맙지 않았으나. 인터넷을 떠돌다가 2년 전 한 유저가 남긴 댓글을 보았다. “우리가 원하는 건 완벽하고 잘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견디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는 모습”이라고 적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을 눌러 댓글은 아직도 맨 위에 올라와 있었다. 2년 내내 그 댓글은 시대의 마음을 대..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폭우 지난 - 신철규(1980∼ ) [동아/ 2023-07-01]

폭우 지난 - 신철규(1980∼ ) 나는 지은 죄와 지을 죄를 고백했다 너무나 분명한 신에게 빗줄기의 저항 때문에 노면에 흥건한 빗물의 저항 때문에 핸들이 이리저리 꺾인다 지워진 차선 위에서 차는 비틀거리고 빗소리가, 비가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차 안을, 메뚜기떼처럼, 가득 메웠다 내 가슴을 메뚜기들이 뜯어 먹고 있다 뻑뻑한 눈 비틀거리는 비 폭풍우를 뚫고 가는 나비처럼 바닥에 떨어져 젖은 날개를 퍼덕이는 몸부림처럼 목에 숨이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찬 숨이 나오지 않는다 (하략) 이 시는 빗속을 날아가는 나비와 같다. 나비의 탄생이 그러하듯 작년 봄에 나온 시집에 들어 있다. 발견하자마자 시의 날개를 접어 그대로 덮어두었다. 7월의 폭우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할 작품이기 때문이다. 혼자 운전 중인 한 사..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1973∼ ) [동아/ 2023-06-24]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1973∼ )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공단 지대를 경유해 온 시내버스 천장에서 눈시울빛 전등이 켜지는 저녁이다 손바닥마다 어스름으로 물든 사람들의 고개가 비스듬해지는 저녁이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문득 하나씩의 빈 정류장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내버스 뒤쪽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을 저녁이라고 부른들 죄가 될 리 없는 저녁이다 (하략) 세상이 아프다. 전쟁이 터지고 난민은 떠돈다.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난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인다. 세상을 배워가고 있는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