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429

[나민애의 시깃든삶] 계속 - 안미옥(1984~ ) [동아/ 2024-06-15]

계속- 안미옥(1984∼) 선생님 제 영혼은 나무예요제 꿈은 언젠가 나무가 되는 것이에요아이가 퉁퉁 부은 얼굴로주저앉아 있다가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간다영혼이란 말은 언제부터 있어서너는 나무의 영혼이 되어버렸나영혼은 그림자보다 흐리고영혼은 생활이 없고영혼은 떠도는 것에 지쳤다영혼은 다정한 말이 듣고 싶다영혼은 무너지는 집 아래 깔린 나무의 몸통영혼은 자라서영혼은 벗어날 수 있는 곳영혼은 찢고 부서지고 아물면서영혼은 있다.(하략)6월이 오면 소개하고 싶어 아껴둔 시집이 있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는 겨울에 발간되었지만 그 안에 여름의 시가 여럿 된다. 6월에는 6월의 시를 읽어야 한다는 분께 추천드린다.사실 6월 타령은 시를 읽을 핑계일 뿐이다. 안미옥 시인의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여름이 아니다..

[나민애의 시깃든삶] 내 울음소리 - 조오현(1932∼2018) [동아/ 2024-06-01]

내 울음소리 - 조오현(1932∼2018)한나절은 숲속에서새 울음소리를 듣고반나절은 바닷가에서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언제쯤 내 울음소리를내가 듣게 되겠습니까.‘내 울음소리’는 현대 시조이다. ‘시조’라는 말을 듣고 나면 조금 더 보인다. ‘한나절은 숲속에서’,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이런 표현들이 리듬감 있게 읽혔던 이유가 보인다. ‘언제쯤’이라는 세 글자가 종장의 첫 글자수를 지킨 결과임도 보인다.‘내 울음소리’를 쓴 사람은 시인이면서 스님이고 구도자였다. 이 말을 듣고 나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시에 등장하는 ‘숲’의 자리에 스님의 암자가 있던 설악산을 놓을 수 있다. ‘바닷가’라는 단어를 읽으며 동해안을 연상할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는 마지막 구절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사실, 초장과 중장만 읽으..

[나민애의 시깃든삶]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 신경림(1936∼2024) [동아/ 2024-05-25]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 신경림(1936∼2024)    (…)사람 사는 곳어디인들 크게 다르랴,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옹다옹 싸우다가,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매화꽃 피고 지기 어언 십년이다.어쩌면 나는 내가 기껏 떠났던 집으로되돌아온 것은 아닐까.아니, 당초 집을 떠난 일이 없는지도 모르지.그래서 다시,아주 먼 데.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그 먼 데까지 가자고.나는 집을 나온다.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몇날 몇밤을 지나서.시인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가난한 사랑노래’부터 알았다. 중학생 때였는데, ‘왜 모르겠는가’ 묻는 시 앞에서 이 시인은 꼭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의 이름에 익숙해지기 전에 ‘목계장터’부터 배웠다. 나는 가보지도 않..

[나민애 시깃든삶] 호각 - 남지은 (1988~ ) [2024-05-11]

호각 - 남지은 (1988~ ) 새소리는 어디서 왔을까새도 숲도 없는 이곳에 새소리가 들려왔다면내 안에서 네 안에서 그도 아니면신이 있다면 새소리로 왔을까늪 같은 잠 속에서 사람들을 건져내고아침이면 문가로 달아나는반복되는 장난은빛 깃털만이 신의 화답으로 놓인다면 그도 신이라 부를까내가 새소리를 듣는다면잠결에도 아기 이마를 짚는 손과손을 얹을 때 자라는 조그만 그늘에도내려앉는포개지는 글자 (후략)내가 좋아하는 한 시인이 예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새로 등단한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은 꼭 챙겨 본다고. 그렇다면 그는 남지은 시인의 신간도 읽었겠다 싶다. 시인의 첫 시집은 단 한 번뿐이다. 딱 시인의 수만큼만 존재한다. 그 귀한 것을 읽으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접어놓은 페이지는 ‘호각’이다..

[나민애의 시깃든삶]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1961∼ ) [동아/ 2023-12-23]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1961∼ )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강은,안타까웠던 것이다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몸을 바꿔 흐르려고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강은,어젯밤부터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12월이 되면 선생님은 학생들과 작별할 준비를 한다. 애들 때문에 힘들기도 했을 테지만 헤어지고 나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못해 준 것만 생각이 난다. 데굴데굴 잔머리 굴리려는 학생도 귀여웠다. 이거 드려도 되나 걱정하면서 핫팩을 놓고 가는 학생은 오래 남는다. 짧다면 짧은 시간 함께했던 학생들이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높새가 불면 - 이한직(1921∼1976) [동아/ 2023-12-16]

높새가 불면 - 이한직(1921∼1976) 높새가 불면 당홍 연도 날으리 향수는 가슴에 깊이 품고 참대를 꺾어 지팡이 짚고 짚풀을 삼어 짚새기 신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슬프고 고요한 길손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황나비도 날으리 생활도 갈등도 그리고 산술도 다 잊어버리고 백화를 깎아 묘표를 삼고 동원에 피어오르는 한 떨기 아름다운 백합꽃이 되오리 높새가 불면 이한직 시인이 이 시를 ‘문장’지에 발표했을 때가 1940년이었다. 유망한 청년 시인이 등장하자 정지용은 “젊고도 슬프고 어리고도 미소할 만한 기지를 갖춘 당신”이라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작품 수가 적고 활동한 기간이 길지 않아 지금은 전집 하나 남지 않았지만 이한직의 초기 시는 분명 눈부셨다. 일견 어두운 내용 같아 보이지만 죽고 싶다는 절망감보..

[시가 깃든 삶] 다정도 병인 양 - 이현승(1973∼) [동아/ 2023-12-09]

다정도 병인 양 - 이현승(1973∼)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두 살의 주인공에게로 울분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로 끝나는 시조의 한 구절이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밥풀 - 이기인(1967∼) [동아/ 2023-12-02]

밥풀 - 이기인(1967∼) 밥풀은 수저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풀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네 오늘 밥그릇엔 초저녁 별을 빠뜨린 듯 먹어도 먹어도 비워지지 않는 환한 밥풀이 하나 있네 밥을 앞에 놓은 마음이 누룽지처럼 눌러앉네 떨그럭떨그럭 간장종지만 한 슬픔이 울고 또 우네 수저에 머물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저녁의 어둠 이 저녁의 아픈 모서리에 밥풀이 하나 있네 눈물처럼 마르고 싶은 밥풀이 하나 있네 가슴을 문지르다 문지르다 마른 밥풀이 하나 있네 저 혼자 울다 웅크린 밥풀이 하나 있네 혼자 먹는 밥상이 분명하다. 맛있는 반찬은 하나도 없고, 입맛도 없고, 살아야 하니까 먹는 식사임이 분명하다. 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니 퍼뜩 정신이 돌아왔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밥을 먹는구나, 먹..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1948∼1991) [동아/ 2023-11-11]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1948∼1991)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행복을 위해서 살면 더 고달프다. 사는 것은 그 자체로도 힘든 일이어서 목표가 너무 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