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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42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무화과 숲 - 황인찬(1988∼) [동아/ 2023-11-04]

무화과 숲 - 황인찬(1988∼)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한눈에 반할 때가 있다. 처음 본 그 순간에 결정된다. 마음이 덜컥 기우는 건 의외로 순식간이다. 왜 반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 이유를 따져서 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를 한두 편 보는 게 아닌데, 이 시는 처음 보자마자 ‘너무 좋다’라는 반응이 먼저였다. 사람이 사람 아닌 것에 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황인찬의 이 작품은 알려주었다. 이 시에는 설명이 많지 않다. 쌀 씻는 저녁은 가까이 보이고, 사랑하는 꿈은 희미해 보인다. 그렇지만 시를 읽어가며 우리..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화남풍경 - 박판식(1973∼) [동아/ 2023-10-28]

화남풍경 - 박판식(1973∼)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얼마 전에 박판식 시인이 상을 받았다. 수상 기사를 접하자마자 ‘화남풍경’이 떠올랐다. 시인의 첫 시집,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시인이 무언가를 자신의 첫 시집, 첫 페이지에 놓았다는 것은 운명이고 총체라는 의미다. 시인이 그 시를 고른 것이 아니라 그 시가 시인을 선택해 찾아왔다는 말이다. 이 아름다운 시를 사랑하여 추천한 이들이 많다. 처음에는 문태준 시인이, 그 다음..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 - 김성규(1977∼)[동아/ 2023-10-21]

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 - 김성규(1977∼) 어린 강아지를 만지듯 잇몸에 손가락을 대본다 한 번도 알지 못하는 감각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살 만한 것인가 이빨로 물어뜯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말한다 이를 잘 숨기고 필요할 때 끈질기게 물어뜯으라고 이렇게 부드러운 말 속에 피의 비린 맛이 숨어 있다니 그러나 그들은 늘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제는 살고도 죽고도 싶지 않은 나이 오늘도 나는 시장에 간다 뺀 이를 다시 사고 싶어 그러나 내 잇몸에 맞는 것은 없고 구름이 핏빛 솜뭉치로 보인다, 라는 구절을 생각해본다 나의 아버지는 시인이었는데 월급을 타면 서점을 돌며 문예지를 사셨다. 30년이 지나고 보니 나도 매달 문예지 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잡지에서 기억하고 싶은 시..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편지 - 김남조(1927∼2023) [동아/ 2023-10-13]

편지 - 김남조(1927∼2023)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대시인께서 작고하셨다. 상복을 입고 출근했다가 장례식장에 찾아갈 참이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김남조 시인의 소식을 전하는데 금방 알아듣지 못한다. ‘겨울 바다’를 지은 시인이라니까 많이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는 시의 구절을 읊어주니 대부분 알아챈다. 시인은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백운산 업고 가을 오다 - 신용목(1974∼) [동아/ 2023-10-07]

백운산 업고 가을 오다 - 신용목(1974∼) 타는 가을 산, 백운 계곡 가는 여울의 찬 목소리 야트막한 중턱에 앉아 소 이루다 추분 벗듯 고요한 소에 낙엽 한 장 떠 지금, 파르르르 물 어깨 떨린다 물속으로 떨어진 하늘 한 귀가 붉은 잎을 구름 위로 띄운다 마음이 삭아 바람 더는 산 오르지 못한다 하루가 너무 높다 맑은 숨 고여 저 물, 오래전에 승천하고 싶었으나 아직 세상에 경사가 남아 백운산 흰 이마를 짚고 파르르르 떨림 이 시를 쓴 신용목은 가을이나 바람처럼 쓸쓸한 것들을 잘 다루는 시인이다. 사실 ‘다룬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시라는 붓끝으로 그려낸다고 말해야 옳다. 눈앞의 사물을 정밀히 그리는 것이 극사실주의이고, 이런 경향이 그림에서도 지나간 사조가 된 것처럼 시에서도..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코스모스 - 김사인(1956∼ ) [동아/ 2023-09-23]

코스모스 - 김사인(1956∼ )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소설가 이태준의 수필 중에 ‘가을꽃’이라는 짧은 글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갑자기 가을꽃이 짠하면서도 거룩하게 느껴진다. 이태준이 말한 것은 비단 꽃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짚어낸 가을꽃의 속성에서는 사람의 태도라든가 인생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꽃 하나를 놓고도 세월이라든가 우리네 삶까지 읽을 수 있다. 김사인의 이 시도 가을꽃을 제목으로 삼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시의 주인공이 코스모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적막이 오는 순서 - 조승래(1959∼ ) [동아/ 2023-09-16]

적막이 오는 순서 - 조승래(1959∼ ) 여름 내내 방충망에 붙어 울던 매미. 어느 날 도막난 소리를 끝으로 조용해 졌다 잘 가거라, 불편했던 동거여 본래 공존이란 없었던 것 매미 그렇게 떠나시고 누가 걸어 놓은 것일까 적멸에 든 서쪽 하늘, 말랑한 구름 한 덩이 떠 있다 여름은 격렬하다. 그것은 타는 듯한 열기와 소란스러운 매미 소리와 장맛비 같은 것으로 온다. 해가 갈수록 여름은 뜨거워지고, 세월이 지날수록 여름은 부담스럽다. 사는 일 자체도 경쟁으로 달아오르는데 거기에 여름의 열기까지 보태자니, 청춘도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가 지쳐 갈 무렵 여름의 격렬함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그 사라진 빈자리로 가을은 온다. 그러니까 가을은 지우면서 들어서는 계절인 셈이다. 소란스러움 대신 침묵하고 싶은 계절.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하늘 바라기 - 이준관(1949∼) [동아/ 2023-09-09]

하늘 바라기 - 이준관(1949∼) 청보리밭 청하늘 종다리 울어대면 어머니는 아지랑이로 장독대 닦아놓고 나는 아지랑이로 마당 쓸어놓고 왠지 모를 그리움에 눈언저리 시큰거려 머언 하늘 바라기 했지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읽다 보면 ‘호모 비아토르’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행하는 인간’이라는 뜻인데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다는 설명이다. 인류란 무엇인가를 쫓아가고 이동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여행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코로나 시절에 그렇게 갑갑했던가 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동이라든가 여행은 반드시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도 알지 못하는 대상을 쫓아갈 수 있다. 우리는 희망만으로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 달려 나갈 수 있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여름 가고 가을 오듯 - 박재삼(1933∼1997) [동아/ 2023-09-02]

여름 가고 가을 오듯 - 박재삼(1933∼1997) 여름 가고 가을 오듯 해가 지고 달이 솟더니, 땀을 뿌리고 오곡을 거두듯이 햇볕 시달림을 당하고 별빛 보석을 줍더니, 아, 사랑이여 귀중한 울음을 바치고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노래를 찾는가. 시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유명하기 때문에 박재삼은 가을을 대표하는 시인처럼 보인다. 쓸쓸하니 고적한 말투 때문에 더욱 가을을 상징하는 시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시집을 읽다 보면 박재삼은 가을이 아니라 모든 자연의 시인임을 알게 된다. 자연에 대한 감각이 유독 섬세해서 스쳐 부는 바람도 느낄 줄 알았고 나뭇잎의 물살도 볼 줄 알았다. 자연을 사랑해서 자연스럽게 자연을 닮아 간 시인. 계절에 몸을 맡겨 시를 자아냈던, 자연과 시로 화답한 시인이 바로 박재삼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연년생 - 박준(1983∼ ) [동아/ 2023-08-26]

연년생 - 박준(1983∼ ) 아랫집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마다 형 지훈이는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울고 동생 지호는 엄마, 엄마 하고 운다 그런데 그날은 형 지훈이가 엄마, 엄마 울었고 지호는 옆에서 형아, 형아 하고 울었다 8월 늦장마가 지겹다면 박준의 시집을 추천한다. 5년 전에 나온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읽다 보면 장마의 쓰임새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장마라고 해도 당신과 함께 볼 수 있다면 싫지 않다. 장마여도 당신과 함께 겪는다면 감사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소중한 ‘당신’이 있다. 아무리 나 자신만 중요한 현대사회라고 해도 우리는 때로 나 때문이 아니라 소중한 당신 때문에 살아간다. 그러니까 죽지 말자. 제발 죽이지 말자. 같은 시집에 이 시가 실려 있..